정조의 개혁 기법 속에 현대의 경영기법이 그대로 적용됨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최근 일이 너무 많아, 정조의 내용 정리를 2회차나 올리지 못했네요. 어제 강의 내용마저 정리를 못하면 저만 알고 묻혀버릴 것 같아 우선 이 내용을 먼저 정리합니다.

정조의 시대는 태조/태종의 창업시대 > 세종/성종의 수성시대를 겨처 영조의 대를 이어 경장更張의 정치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경장이란 거문거의 줄을 고친다/조인다의 의미로 시대적 상황이 사회 전반에 걸친 시스템을 개혁해야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를 위해 정조가 해결하기 위한 비유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나라를 치료하는 것과 같다. 유추해보면 배울 것이 많다”며 ▲ 진단,  ▲ 지향목표/비전, ▲ 처방의 순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치국을 한다라고 함은 나라의 병을 다스리는 일로써 이를 진단하여 목표(비전)을 수립하고 처방을 내려하는 구조로, 대표적인 예가 정조의 7대 연설 중의 하나인 경장대고 (정조 2/6/4) 이다.  이를 요약하는 것 보다는 실록의 원문을 그대로 살려 임기 3년만에(세종은 4-5년간 상왕 태종의 밑에서 삼가고 조심하면서 국왕 수습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좀 길긴하지만, 그 220년 전의 조선의 시대상황과, 정조가 이를  어떻게 진단하고, 목표/비전을 수립하여, 향후 20년간의 경장/국가운영을 추진하는 뼈대가되는지에 대해 직접 같이 느꼈으면 합니다.

 

민산·인재·융정·재용에 관한 대고를 선포하다 (경장대고, 1778년 정조 2/6/4)

 

[배경]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받고, 대고(大誥)를 선포하기를,
“과인(寡人)이 열조(列祖)의 큰 서업(緖業)을 이어받았기에 낮이나 밤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기를 마치 깊은 못의 얼음을 밟듯이 해 온 지 이제 3년이 되었다.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을 부묘(祔廟)하는 예제(禮制)가 이미 끝나고 의문(儀文)도 즉길(卽吉)했으므로, 이에 곤면(袞冕) 차림에 종고(鍾鼓)를 차리고서 태묘(太廟)를 지알(祗謁)한 다음에 군신(群臣)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이 예식(禮式)은 곧 선왕(先王)들의 예법이다. 오직 소자(小子) 내가 선왕의 자리에 서서 선왕의 백성에게 임하게 되었으니, 감히 선왕의 마음과 같이 마음을 먹고 선왕의 정사(政事)와 같이 정사를 하여 우리 선왕께서 뜻하시던 일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제 일초(一初)의 처음을 꾀하는 기회를 당했으니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마땅히 서로 닦아 가는 도리를 힘써야 한다. 이에 대궐 뜰에서 탄고(誕誥)하게 된 것이다. 그 조목에는 무릇 네 가지가 있는데 민산(民産)과 인재(人材)와 융정(戎政)과 재용(財用)에 관한 것이다.

[민산 民産: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겠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무릇 그 사람들을 바로잡아 가는데 이미 부유해지게 해주어야 바야흐로 착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였고, ‘백성의 살림살이를 제정(制定)하는 데에는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상고(上古)의 정전(井田)1304) 의 법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고, 오직 명전(名田)1305) 한 가지 일이 가장 근고(近古)의 것인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래에는 일찍이 시행하지 않았다.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땅덩이가 편소(褊小)한데다가 산과 계곡이 대부분이어서 정전(井田)의 경계(經界)를 설시(設施)하기 어렵기도 하고 호우(豪右)1306) 들이 모두 제것으로 만들고 있기에, 조종조(祖宗朝)의 융성(隆盛)한 시절부터 균전(均田)이나 양전(量田)의 의논을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었으니, 대개 풍습이 된 세속을 고치기도 어렵고 뭇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민생들의 먹고 사는 길이 오직 부지런히 농사 짓는 데 달려 있건만 사람들이 각기 제 전토(田土)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다면, 비록 힘을 다하려고 한들 어떻게 하게 될 수 있겠느냐?
공업(工業)과 상업(商業)은 말단의 직무이지만 민생들이 이를 힘 입어 의식(衣食)을 유족하게 하여 오히려 이용 후생(利用厚生)하는 거리로 삼고, 천택(川澤)의 생리(生利)로 말하면 바닷가의 지역에서도촉고(數罟)1307) 를 쓰지 않고 있음은 시기(時期)에 맞추어서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곧 민생들의 힘이 고갈되어 버리고 국가의 부세(賦稅)가 무겁게 되어서이다. 또 동남쪽 바다에서의 어산(魚産)이 대부분 요동(遼東)과 발해(渤海)로 돌아가버리게 된 것은 지리(地理)의 변천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느냐? 초채(樵採)의 생업(生業)으로 말하건대, 그전에는 우거져 있던 것들이 지금은 민둥민둥하게 되었으니, 이는 궁방(宮房)들이 마구 점유(占有)해서가 아니면 아문(衙門)들이 양탈(攘奪)해서임을 알 수 있다. 저 가마솥을 씻어 놓고 땔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 속에서 간신히 구득해 온 것이 또한 얼마나 될 수 있겠느냐? 방적(紡績)의 여공(女工)으로 말하건대, 열 손가락에서 생산되는 것이 모두 현관(縣官)에게 실어다 주어버리게 되고, 앙병(盎甁)의 저축으로 말하건대, 백묘(百畝) 농사의 나머지가 과부(寡婦)에게 미치지 못하게 된다.
아! 한 도(道)를 안찰(按察)하고 그 고을을 맡은 신하들이 이미 자신이 직책을 다하여 민생들의 심지(心志)를 안정되게 하지 못하고 따라서 탐묵(貪墨)한 아전들이 문부(文簿)를 농간하여 사리(射利)1308)하느라 살갗을 방망이질하여 골수(骨髓)를 긁어내므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군적에 올림[簽丁]이 젖먹는 어린이에도 미치어 아이들도 면하지 못하게 되고 저 백골(白骨)에게도 징세(徵稅)하여 향당(鄕黨) 전체가 곤궁하게 된다. 향리(鄕里)에서 무단(武斷)1309) 하는 짓을 하고 우민(愚民)에게 잔학(殘虐)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자못 강동(江東)의 삼해(三害)보다도 심하게 되는데, 무릇 이러한 폐단을 하나하나 들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사설(司設)의 상평창(常平倉)에 명칭이 토포(討捕)라는 제민사(濟民使)를 두어,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등급을 구분하는 격식(格式)을 반포하고 겨울이 다 가고 나면 봉납(捧納)을 정지하도록 하는 영을 내리게 하고 있다. 또한 그 해에 흉년이 들면 곡식을 옮겨 오고 경사(慶事)를 만나면 전조(田租)를 감해 줌은 수해(水害)와 한해(旱害)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요, 도적(盜賊)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며, 민생의 기아(飢餓)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요, 낙(樂)을 민생들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다마는, 이는 모두가 소소한 혜택인 것이니 어찌 민생들의 살림살이를 제정(制定)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근본에 있어 힘쓰라고 한다면 어찌 그렇게 할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비록 일명(一命)1310) 의 사(士)라 하더라도 진실로 애물(愛物)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구제(救濟)해 가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고 한 것이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인재 人材: 인재를 양성하겠다.]


《시경(詩經)》에 ‘여러 왕(王)은 길사(吉士)가 많다.’고 했었거니와, 인재(人材)를 성취(成就)시키는 것은 반드시 교육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태상(太上)에는 빈흥(賓興)1311) 을 하였고 그 다음은 향거(鄕擧)1312) 인데,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로 내려오면서는 오로지 과거(科擧) 제도를 숭상하게 되었다.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서로 계승해 오며 유현(儒賢)들이 배출(輩出)하게 되었기에, 그 시절에는 낭묘(廊廟)의 인재(人材)도 있고 간성(干城)의 인재도 있으며 방악(方岳)의 인재도 있었고, 백집사(百執事)들에 있어서도 모두 적재(適材)를 임용(任用)하게 되어, 조정에는 휘정(彙征)1313) 하는 미덕(美德)이 있게 되고 초야(草野)에는 유일(遺逸)의 한탄이 없게 되어, 인재가 일어남이 이제서야 융성(隆盛)하게 되었었다.
아! 인재를 작성(作成)하는 방도는 오직 배양(培養)과 교육인 것인데, 평소에 배양이 있지도 못하고 교육하는 방법이 있지도 못하여 이미 덕(德)과 문예를 훈적(訓迪)해 가는 것이 없고 단지 과목(科目)으로만 취사(取捨)하고 있는데, 고시(考試)를 두고 말을 하자면 조정에서는 매양 고관(考官)들을 의심하고 있고 고관들은 문득 사자(士子)들을 속이는 짓을 하고 있다. 상하(上下)가 이처럼 믿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 어떻게 준수(俊秀)한 영재(英才) 들을 찾아내어 국가의 수용(需用)이 되기를 바랄수 있겠느냐?
현관(賢關)1314) 은 수선(首善)의 자리인 것인데 경서(經書)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하겠고, 상서(庠序)는 인재를 배양하는 본거지(本據地)인데 한갓 문사(文詞)만 숭상하는 데가 되어버려, 순후한 세속(世俗)이 더욱 투박해지고 홍장(鴻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무과(武科)나 의과(醫科)나 역과(譯科)나 음양 율력과(陰陽律曆科)에 있어서도 모두 폐단이 그러하여 다같이 똑같은 전철(前轍)을 답습(踏襲)하고 있다. 전선(銓選)으로 말하건대, 감별(鑑別)하는 지혜는 밝지 못하고 요행(僥倖)을 노리는 문만 크게 열리어 출척(黜陟)은 고적(考績)을 따르지 않고 주의(注擬)는 관(官)을 위한다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청현(淸顯)의 관함(官銜)은 어느 시대에 시작된 것인지 경상(卿相)의 진출(進出)을 매개(媒介)하는 계제(階梯)가 되어 있고, 지벌(地閥)에 따라 임용(任用)함은 더없이 의의(意義)가 없는 것으로서 한준(寒畯)1315) 들은 발신(發身)할 길이 없게 만드는 일이다. 교육(敎育)과 전선(銓選)의 방법이 위와 같이 잘못되어 있으니, 비록 다스려진 세상을 이루려고 하더라도 또한 어긋나지 않겠느냐?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자급(資級)을 따르는 법은 외람(猥濫)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견서(甄敍)1316) 의 규정은 침체(沈滯)되어 있는 사람을 소통(疏通)시키기 위한 것이다. 염절(廉節)의 포양(褒揚)은 자손에게까지 미치고 탐묵(貪墨)의 징계는 죽을 때까지 이르며, 정부(政府)에서는 방백(方伯)의 인재를 추천하고 번신(藩臣)은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해 왔는데, 이는 모두가 말절(末節)의 것이니, 어찌 인재를 성취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근본에 있어 힘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런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주(周)나라 문왕이 수고(壽考)하는데 어찌 인재를 진작시키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용정 戎政: 국방을 개혁하겠다.]


《역경(易經)》에 ‘문을 겹으로 달고 딱다기를 쳐서[擊柝] 폭객(暴客)을 대비(待備)한다.’고 했다. 융정(戎政)을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제치(制置)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성주(成周) 시대의 군사는 사도(司徒)에 병적(兵籍)을 두고 사마(司馬)에 소속했었으니, 군사를 농군(農軍)에다 붙여 놓았던 것이다.한(漢)나라의 남군(南軍)·북군(北軍)과 당(唐)나라의 16위(衛)와 송(宋)나라의 동·서반(東西班)과 황조(皇朝)의 12위(衛)는 다같이 장단(長短)의 구별이 있은 것으로서, 농군과 군사가 이때부터 구분되어졌던 것이다.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문치(文治)로 나라를 세우고 무략(武略)도 또한 갖추었었다. 부병(府兵)에서 삼군(三軍)이 되고 삼군에서 오위(五衛)로 했었는데, 내부(內部)에는 총관(摠管)을 두고 외부에는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각각 통령(統領)을 두고 병마(兵馬)가 일체(一體)가 되었었으며, 관(官)이 늠희(廩餼)를 허비하는 것이 없고 군사는 정예(精銳)의 칭호가 있다. 비록 고려 말기(末期)의 폐단을 징계 삼았던 것이나 또한 주(周)나라 초기(初期)의 법을 모방했던 것이다. 이러므로 수비(守備)를 굳건하게 하고 공격을 하면 이기게 되었던 것이며, 임진년1317) 이후에는 비로소 훈국(訓局)을 두었는데 이로부터 분군(分軍)의 제도가 만들어지고 드디어 오위(五衛)를 폐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듭 모병(募兵)하여 영(營)을 설치하고 부(部)를 나누어 국(局)을 설치하고, 또 기보(畿輔)의 군사를 갈라서 거느리게 하고서는 혹은 병사(兵使)라 부르고 혹은 대장(大將)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이는 모두 다 조치(措置)가 번잡하게 되고 연혁(沿革)이 무상(無常)하게 된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곤외(閫外)를 절도(節度)해 가는 제도가 혼란스러워 기강이 없고 곤내(閫內)에 비하여 더욱 몇 갑절이나 되었다.
제승(制勝)의 방략(方略)을 두고 말하면 장수는 범처럼 굳센 위엄이 없고 군사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되는 염려가 있었으며, 삼군(三軍)을 오영(五營)에 나누어 소속하고서 이 오영이 각기 하나씩의 영을 전관(專管)하였으니, 군사가 가병(家兵)의 폐단이 다문(多門)하게 되는 염려에 가깝지 않겠느냐? 연습(鍊習)하는 방법을 두고 말한다면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손빈(孫殯)·오기(吳起)의 병서(兵書)는 고각(高閣)에 묶어 놓고서 장조(場操)와 수조(水操)의 격식은 문득 아이들의 놀이처럼 여기게 되었다. 대개 척법(戚法)이 나오면서는 옛적의 제도가 무너져버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소위 왜적(倭賊)들을 방어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오히려 방도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거든, 더구나 사방 국경(國境)에 있어서의 미리 대비하는 군적(軍籍)을 두고 말한다면 한정(閑丁)이 날마다 줄어들게 되고, 마정(馬政)으로 말한다면 목축(牧畜)이 번성하게 되지 못하며, 양병(養兵)하는 방도로 말한다면 군향(軍餉)도 배포(配布)하고 군보(軍保)도 설시하여 법 세우기를 처음부터 치밀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더 거두는 폐단이 흘러 오게 되어 온 나라 재부(財賦)의 절반을 가져다가 하나의 미려(尾閭)1318) 와 같은 데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변방에 전진(戰塵)의 경보(警報)가 있게 되어 우격(羽檄)1319) 이 방오(旁午)1320) 하게 된다면, 이와 같은 제치(制置)로는 비록 옛적의 명장(名將)에게 곤외(閫外)의 임무를 맡게 한다 하더라도 계책과 방략(方略)을 펴가게 되지 못할 것이 뻔하니, 참으로 이른바 ‘근본이 올바르지 못하면 말단에서는 구제해 갈 수 없는 것이라.’고 한 말과 같은 일이다.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일성(日省)과 월시(月試)는 강습(講習)시키기 위한 것이고, 상(賞)을 후하게 주고 벌을 가볍게 함은 격려(激勵)하기 위한 것이며, 천경(踐更)1321) 은 노력과 휴식을 균등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호군(犒軍)은 고락(苦樂)을 같이하기 위한 것이다. 영(營)에는 각각 장수를 두되 대신(大臣)이 영도(領導)하고 문사(文士)가 보좌(補佐)하게 하였고, 대소(大小)의 영진(營鎭)에 있어서도 다같이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두어 각기 서로 유지(維持)해 가고 견제(牽制)해 가도록 했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마는, 어찌 융정(戎政)을 잘 다스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근본을 힘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만한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하였으니, 그렇게 되어지지 않겠느냐?

[재용 財用: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겠다]



경서(經書)에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길은 반드시 저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夏)나라에는 공법(貢法)을 쓰고 은(殷)나라는 조법(助法)을 쓰고, 주(周)나라는 철법(徹法)을 쓰고, 한(漢)나라는 삼십세법(三十稅法)을 쓰고, 당(唐)나라는 조용법(租庸法)을 썼으니, 시대마다 각각 제도가 달랐지만 모두가 아랫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우리 동방(東方)에 있어서는 그 땅에서 나는 것에 따르며 토질(土質)의 비옥(肥沃)을 구별해서 그 등급을 세 가지로 하되, 부(賦)에다가 공법(貢法)을 섞어서 하여 공(貢)과 부(賦)가 균등하게 되어 있다. 이래서 국가에는 항시 저축(儲蓄)이 있게 되고 민생들은 생업(生業)을 즐거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경비의 용도(用度)가 점차로 넓어져 공용(公用)이나 사용(私用)이 다 같이 곤란해지므로, 재물을 거두어 들이는 방도에 있어서 이미 남기어 놓는 것이 없이 하게 되었고, 재물을 소모하는 길에 있어서도 거의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탕저(帑儲)로 말하건대, 한 해의 수입이 한 해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용관(冗官)과 용병(冗兵)들이 먹는 것이 10에 7, 8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기 관부(官府)를 두고서 전곡(錢穀)을 나누어서 관장(管掌)하게 되어, 판조(版曹)에서 지출과 수입의 액수(額數)를 전관(專管)하지 못하게 되고, 혜국(惠局)에서도 대소(大小)의 공급을 관할할 수 없게 되었다. 폐해가 잘못을 답습(踏襲)하는 데에 있게 된 것인데도 폐단이 고질이 되어 그대로 인순(因循)하고 있다. 창름(倉廩)의 평적(平糴)과 화조(和糶)로 말하건대, 제도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미 오래도록 연습(沿襲)해 오면서 옛적 본래의 뜻이 점차로 없어지게 되고, 적렴 조산(糴斂糶散)이 합당하게 되지 못하여 탐심(貪心)을 부리는 폐단스러운 법이 되어버렸다. 안으로는 경사(京司)와 밖으로는 열읍(列邑)들의 부정(不正)을 저지르는 명목(名目)과 근거가 없는 명색(名色)이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계책은 먹을 것이 있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도리어 민생들이 해독을 받게 된 것이다. 비기(肥己)하는 폐해가 점차로 퍼지며 따라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게 되었으니, 이러고서는 비록 날마다 포리(逋吏)들을 죄주고 날마다 곤궁한 백성을 독촉을 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느냐?
정각(征榷)1322) 으로 말을 한다면, 관시(關市)에서 정세(征稅)하지 아니하고 택량(澤梁)을 금단하지 아니하였음은, 성왕(聖王)들이 백성들과 함께 이득을 다 같이 보기 위한 뜻이었다. 오늘날 어선(漁船)에는 장척(丈尺)에 따라 세(稅)가 있고 염부(鹽釜)에도 대소(大小)를 정하여 징세(徵稅)하고, 동·철(銅鐵)과 은·연(銀鉛)에도 모두 징수하고 있으며, 민결(民結)과 신포(身布)에 이르기까지 정세(征稅)하지 않는 이득이 없게 되고 정각(征榷)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는 신포(身布)를 감해 주고 대신으로 보충하는 수를 하는 일에서 연유하게 된 것이니, 선왕(先王)들의 뜻이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겠느냐? 이러므로 선왕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균역(均役) 한 가지 일은 곧 나의 사업(事業)이다마는 그래도 인정(人情)에 잘 맞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일을 주간(主幹)할 신하들의 자손이 흥(興)하게 되는지 쇠(衰)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 착한 일인지 착하지 못한 일인지를 증험하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거룩하신 성인의 말씀이셨으니 오직 과인(寡人)은 다만 마땅히 그대로 준수(遵守)해 가고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달마다 회계(會計)를 하게 되어 있고 해마다 감부(勘簿)를 하게 되어 있음은 미려(尾閭)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관세(官稅)를 혁파하고 공상(貢上) 명목(名目)을 감하였음은 절생(節省)을 힘쓰기 위한 것이다. 이는 모두가 미세한 일인 것이니 어찌 재용(財用)의 넉넉함이 있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근본을 힘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만한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재화(財貨)를 생산하는 데 큰 방도가 있나니, 생산하는 사람은 많고 소비하는 사람은 적으며, 일을 하는 자는 빨리 하고 쓰는 자는 천천히 한다면 재물이 항시 풍족하게 된다.’는 것이니, 그렇지 않겠느냐?

[결론:경장(更張), 소강(小康)]

대저 총합(總合)하여 말한다면 당면한 지금의 폐해는 한 가지만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병이 든 사람이 진원(眞元)이 이미 허약하여 혈맥(血脈)이 막혀버리고 혹이 불거지게 된 것과 같은 꼴이다. 기강(紀綱)이 문란해져 당폐(堂陛)가 존엄(尊嚴)해지지 못하고, 언로(言路)가 막히어 강직(剛直)한 말을 들을 수 없으며, 난역(亂逆)이 잇달아 생겨나 의리가 더욱 어두워졌으니, 무어 위태한 증상(症狀)이 조석(朝夕) 사이에 박두해 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는데도, 이번에 특별히 네 가지 조목을 들게 된 까닭은 진실로 방본(邦本)을 굳건해지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근본이 굳건해지게 하는 것은 민생에게 있고, 민생들을 배양(培養)하는 것은 먹을 것에 달린 것인데, 먹을 것이 족해지면 교육해야 하고 이미 교육하면 반드시 경계하여 보호해 주고 협조하여 유익하게 해 줄 것이니, 이것이 방가(邦家)를 보존하는 대본(大本)인 것이다.
아! 시험삼아 오늘날의 국가 사세를 보건대, 경장(更張)한다고 해야 하겠느냐? 인순(因循)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느냐? 큰 집이 기울어지게 되면 하나의 목재(木材)로는 지탱할 수 없는 것이고, 온갖 내가 터지게 되면 쪽배로는 막기가 어려운 것이다. 삼대(三代) 시절의 제도는 비록 졸급하게 복구(復舊)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소강(小康)의 다스림도 또한 기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증세에 대처할 약제(藥劑)를 알지 못하여 손을 댈 방법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어찌 하지 않고 있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핑계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될 적마다 과인(寡人)의 마음이 진실로 근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과인의 뜻이 확립되지 못해서이고 과인의 학문이 이루어지지 못해서이니, 진실로 허물을 잡아내기로 한다면 오로지 나 일인(一人)에게 달려 있게 된다. 아! 임금은 마땅히 말을 간단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이처럼 그칠 줄 모르고 순복(諄複)하게 되는 까닭은 자세하게 이르려고 하여 말이 번거롭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이(所以)로 선왕(先王)의 대도(大道)를 강구(講究)하고 선왕의 구장(舊章)을 수복(修復)하여, 우리 선왕께서 부여하신 책임을 저버리게 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함께 다스려 가는 여러 현명한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가 깊다. 아! 너희 조정에 있는 군료(群僚)들은 혹시 과인의 분부를 공언(空言)으로 여기지 않고 국가 일을 걱정하기를 가정 일처럼 하여 앞에 말을 한 실속을 힘쓰는 방법으로써 나 과인을 계적(啓迪)해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선포(宣布)가 끝나고, 동·서반(東西班) 및 시위(侍衛)하고 있는 제신(諸臣)과 위졸(衛卒)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들 진주(進奏)하도록 명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은 수령(守令)에 초사(初仕)하는 자를 잘 선택하라 청하고,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은 제도(諸道)에서 세초(歲初)에 인재를 추천하되 전조(銓曹)를 선칙하여 검토해서 임용(任用)하기를 청하였으며, 우의정 서명선(徐命善)은 삼관(三館)의 참상(參上)이 적체(積滯)되어 있으니 전조로 하여금 소통(疏通)시키는 정사(政事)를 힘쓰게 하기를 청하였고,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는 본조(本曹)에서 전후에 등록(謄錄)해 놓은 것을 모아서 한 가지의 서책(書冊)으로 만들어 고거(考據)에 대비(待備)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구선복(具善復)은 각도(各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속오군(束伍軍)을 단속하는 병정(兵政)을 이정(釐正)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후 정조의 경장 개혁 중 군대겨혁, 신해통공, 화성건설은 성공을 하였고, 관료제개혁은 미흡, 노비혁마 및 서얼차별제는 미완으로 끝났다고 하며, 이중 신해통공 및 서얼차별제도에 대해 자세히 진단/비전/처방/결과의 순서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정조의 7대 연설문으로 1) 즉위윤음, 2) 탕평윤음, 3) 경장대고, 4) 신해통공윤음, 5) 화성축성중단윤음, 6) 오회연교, 7) -숙제- 라고 합니다. 다 ‘정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연설들이니 꼭 일독을 권합니다.

 

 

 

Peter Kim에 대하여

김태영 PMP 010-9344-7505 프로젝트리서치(주) 대표/설립 peterkim@projectresearch.co.kr http://www.ProjectResear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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