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 기氣가 센 지형답게 가장 고려/조선시대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산실

세종리더십연구소에서 가을산행으로 마니산을 다녀왔습니다.  마니산이 있는 강화도는 고려/조선시대에 험난한 경험을 했던 곳 입니다.

 

고려시대

1) 강화도 천도시에 여기서 팔만대장경, 금석활자 발명, 우수한 고려청자 제작 등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2) 고려 왕실에 있어서 강화도는 발상지나 다름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장녀인 저민의에게 장가들고 용궁의 신물과 보배를 얻어왔다는 전설이 있다. 강화만일대 해상권을 장악한 대 호족이었다. 왕건은 강화만 일대의 수군세력을 기반으로 궁예의 조정에서 시중이 되었다.

3)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海口郡)→고려 태조 때(940) 강화현→고려 몽골 침입 때와 조선 병자호란 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강도(江都)로 승격.

4) 고려 고종18년(1231, 8. 29) 몽고군 살례탑이 침입하자, 고종 19년(1232.7.7) 강화천도. 일의대수(一衣帶水) 좁은 강폭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1258년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고종 46년(1259)항복의 뜻을 전하였다. 원종 5년(1264) 왕이 몽고에 들어가서 황제를 배알하였다.-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배중손의 삼별초군의 난이 일어났다. 삼별초군은 강화 수비에 큰 공을 세우다가 몽고에 굴복, 원종이 개경환도를 선포하자 자주성을 잃은 왕의 처사에 대항하였다. 육지로 나가는 것을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시대

1) 조선 태종 때(1413)도호부를 두고 병자호란 때 왕자 제빈 종실이 이곳으로 피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방위상 중요시되어 사진(四鎭)의 하나가 되었으며, 연안에 포대(砲臺)를 구축하고 마리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2)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일본의 운요오호(雲揚號)가 침입하였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3)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1636.12.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아 남은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계기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남.

 

 

 

마니산(마리산,468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강화도 남쪽 끝이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사적제 136호로 지정된 단군성조가 천신에게 국운의 융성을 빌었다는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참성단은 지금도 개천절과 전국체전 때 성화가 채화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매년 정월 3일 상경일에 제를 올린다. 마니산 史庫가 있었다.

 

 

정족산성, 전등사(傳燈寺)

1) 팔만대장경을 간행했던 곳으로, 경판을 보관했던 장사각(藏史閣) 남아있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국가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전국에 5곳 설치하였던 사고(史庫)의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여기에 보관돼 있던 왕조실록의 일부가 병인양요(丙寅洋擾)때 약탈당해 현재 프랑스 파리 박물관에 보존돼있다.- 본래 4대사고(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가 왜란 후 5대사고(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봉화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 묘향산본은 청과 관계가 악화되자 무주 적상산으로 옮김.)로 확충되었다.- 강화도 마니산 사고는 숙종4년(1678)에는 전등사 경내 정족산 사고의 장사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에 이전되어 있다. 숙종 39년에는 20세의 청년 왕자인 영조가 선원록(왕실족보) 봉안 도제조가 되어 전등사에 친림하였다.

2) 전등사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 아래에 있다. 처음 진종사(眞宗寺)라 했으나 고려 충렬왕 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381)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강화도가 고구려 영토가 된 것은 소수림왕 11년보다 100년이 지난 장수왕 63년(475)의 일이다. 다만 고려 원종 7년(1266)의 중창 기사는 믿을 만하다.

3) 전등사라는 명칭에 대하여 ; 충렬왕 8년(1282)에 충렬왕 원비 정화 궁주 왕씨는 충렬왕이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강요로 제국공주에게 장가들게 되자 정비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별궁에 내쳐지고 원자도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정화궁주의 명을 받은 승려 인기가 바다를 건너 송에 들어가 송나라 대장경을 인쇄하여와서 갈무리하였던 곳이다. 전등사란 명칭은 정화 궁주가 부처님께 옥등잔을 보시하여 전등사라 사액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 인기가 가져온 송의 대장경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으로부터 이름이 나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4) 전등사의 나부(裸婦) 상 ; 조선 광해군 때 건립된 대웅보전(보물 178호)은  중앙에 석가불, 좌위가 약사불, 우위가 미타불,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하여 마치 용궁인 듯하다. 네 군데 처마 끝에 나부상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네귀퉁이 추녀밑 보머리사이에 발가벗은 목조 여인 나신상이 쪼그리고 앉은 채 추녀를 떠받치고 있다.-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맡긴 돈을 챙겨 달아난 주모의 벌받는 형상이라 하나 제국공주의 투기와 탐음(貪淫)을 저주한 고려 민심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불상좌우에 업경대(業鏡臺)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5) 범종은 우리나라 종의 전형적인 특징인 용머리 모양의 음통이 없고, 대신 주위에 162 송이의 연꽃을 새긴 중국 양식의 종이다. 이 범종은 일제 말기에 공출을 당했으나 해방 후 부평 병기창에서 찾아내어 다시 절로 돌아온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6) 고종 3년 (1866)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이 점령(9. 8~10. 4)하였는데, 정족산성 천총 양헌수 장군이 격퇴하여 사책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동문안에 양헌수장군의 천총 승전비가 있다.

 

 

고려궁지, 강화 역사관

1) 고려궁지(高麗宮址)는 사적 제133호, 경기도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강화도 고려 궁지는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고의 침입 때 도읍을 여기로 옮겨, 원종 11년(1270년) 강화(講和)를 맺어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4년에 건물이 완성되었는데,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지금은 당시의 건물 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들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행궁(行宮)이 세워졌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 강화유수부의 건물이 들어섰으나 지금은 동헌(東軒)과 ㄷ자의 이방청(吏房廳)만 남아 있다. 한쪽에 숙종14년(1688) 강화 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동종이 있다. 1977년 국방유적지로 보수 정화되었다.

2) 강화대교를 건너자 마자 바로 왼쪽 바닷가 쪽으로 갑곶 돈대(포대)와 강화 역사관이 같은 경내이다. 마당입구에 ‘금속활자 발상 중흥 기념비’가 여러 글자체로 새겨져 있다. 마당에는 해선망(醢船網)어선(바닥이 평탄한 ‘곳배’ 조석 간만차가 큰 해역 협수로에서 배를 고정시키고 일일 4회 새우젓을 어획하던 배)을 전시해 두었다. 전시물중 눈에 띄는 것은 선원록(조선왕실 족조)을 보존하였던 괘짝, 병인, 신미양요시에 분전한  양헌수, 어재연 장군의 초상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 바다의 관문을 지키노라 타국의 배는 통과하지 못하노라) 라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결의를 다지는 비문 등이다, ‘帥 ’(수)자 기가 1~2층 계단 중간에 걸려있다. 신미양요 때 광성진에서 뺏긴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장수기(將帥旗)이다. 실물은 신미양요 때  미국 애나폴리스 해관사관학교 박물관에 있고 여기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미군에 빼앗긴 어재연 장수기응 136년 만에 2007.10. 미국이 반환하여 돌아왔다.)

 

 

광성보(廣城堡)

1) 조선시대의 성보(城堡), 신미양요시의 격전장이다. 사적 제27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서 조선 효종 9년(1658)에 창설, 당시의 수비군은 별장 1인, 군관 29인, 사병 100, 돈군은 18인에 전선 5척었다. 안해루라는 누문이 있고 홍이포(大,길이 215cm), 소포(中, 길이 119cm), 불랑기(小, 길이 78cm) 등 3가지 포가 전시되어 있다.

2) 특히 용두돈은 볼만하다. (→ 바닷가쪽으로 용머리처럼 돌출해 있는 암반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다. 이 돈대는 1679년에 축성되었고 병인 신미양요시 포격전으로 파괴된 것을 1977년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강화 전적지 보수정화 기념비가 있고 전면의 큰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강화해협의 흑탕물과 물살이 빠른 것을 볼 수 있고 경치가 빼어나다.

3) 신미양요는 미국상선 셔먼호 소각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1871. 4. 24,  로저즈가 군함 3척 1230명의 병력으로 침입한 韓美戰爭이다. 미군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어재연 장군이 강계포수 등 정예군을 지휘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하였다. (아군 전사 53명, 부상 24명, 포로 20명, 미군측은 매키 중위 이하 전사 3명, 부상 10명) 미군은 조선군의 용감한 군인정신에 놀라 4월 25일 퇴각함으로써 전쟁은 48시간만에 끝났다.5) 1976년 문루와 돈대가 복원되었고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 장군이 백병전을 벌려 순국한 곳에 쌍충비각(문중에서 만듬) 전적비와 무명용사의 무덤이 남아 있다.

 

마니산 가을 산행

세종리더십연구소 세종사랑방 연구회 분들과 함께 마니산에 다녀온 사진 및 동영상 (준비운동 및 산에서 부르는 노래..) 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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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11 10 17 오전 6 21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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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지 참고 : http://skji.hihome.com/t_kiho/ganghwa/ganghwa.htm

 

Peter Kim에 대하여

Peter Kim(김태영) PMP, Certified SAFe 5 Scrum Master (SSM), Certified ScrumMaster® (CSM®), Project Research Inc., CEO / Founder, +82-10-9344-7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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