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주관 정조이야기 2강 내용 공유합니다.

정조의 3대 이미지가 “책, 종, 달”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적 이미지가 바로 그칠 지(止) 입니다. 이미 활쏘기 50발 중 49발을 명중해 놓고도 나머지 1발을 쏘지 않는 이야기로 유명하신데요.
<홍재전서〉 제95권, 경사강의 32(書經). 정조는 장애가 생겼을 때 무시하고 밀고나가는 것(狂)과 장애를 무서워해서 아예 출발도 하지 않는 것(猜) 사이에 있는 중용을 강조했습니다. 그것 은 바로 얼마나 적시에 잘 그칠 수 있느냐(止)에 달려 있습니다. “일에서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 며, 말을 다하려고 하지 말라[重不要做到十分 를不要說十分]”이라는 말도 그칠 지의 용기와 지혜 를 말하는 어록입니다<홍째전서> 161권 일득록 16-24.
정조시대는 문화적 르네상스 중 프로젝트 관계적으로 유심히 봐야할 것이 기록 문화인 것 같습니다. 이미 전세계 최고의 건출 설계서/완료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나 혹은 일성록/홍재전서와 같은 개인의 기록을 매우 꼼꼼히 남기신 점입니다. 정조는 옛 우수한 철학이나 선조의 내용을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하셨는데 대표적으로 다음 도서가 매우 역사적으로 가치가 많다고 합니다.
- 성리학자인 송시열의 저서,시문, 상소 무음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 조선 건국 기획자 정도전이 평생동안 쓴 글을 모아 편찬한 삼봉집(三峰集)
- 현재 거북선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정조를 이해하려면 정조 11살의 나이때 귀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 그리고 영조와의 관계, 아울러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 벽파 및 영조와 50살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15살의 나이에 시집와서 정조와 대립관계를 가지는 정순왕후 김씨(경주김씨, 추사 김정희 선생의 집안)와의 관계를 필히 알아야 합니다. 이를 매우 잘 이야기 형태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이를 해석하는 관점은 두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영조와의 성격적 갈등과 애증, 새옷으로 못갈아 입는 정신병으로 해석하는 정신병리학적 이유, 둘째로는 노론 독주의 정치구도에서 개혁/반대의 입장을 보인 세력관계를 중시하는 정치구조적인 이유로 나뉜다고 합니다. 저는 정치구도적인 면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정조의 정치 노선은 결국 사도세자의 입장을 이어받아 노론을 약화시키고, 조선의 개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孝 와 영조의 직속 후계로 22대 왕이 되어 국사를 해야 하는 충 忠 속에서, 아울러 노론 벽파와의 갈등 대립 구조 상태에서 정조는 무던히 중용을 지키고 임했을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식에서 거론 불문율인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는 청천같은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왕 즉위 원년 왕실까지 암살자가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얼마나 반대 세력들 사이에서 얼마나 팽팽한 삶을 영위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와 지식과 논리로 대립하고 맞서 싸워야 했고, 암살 시도에 반하여 끊임없이 무술 연마, 활쏘기 연습을 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수원화성 축성 후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할때의 “이젠 되었다!”라는 느끼시는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재위 초반에 노론을 제거시킨게 아닌 몇몇 핵심 반대 세력을 감정이 아닌 논리로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 커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칠 아는 , 정조의 정치 철학 중 권도론과 그칠 지(止)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정조의 대처 방식을 배운 것 같습니다.
일에서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 며, 말을 다하려고 하지 말라重不要做到十分 를不要說十分– 정조, 홍재전서 161권 일득록
이후 또 한차례의 호프 뒷풀이는 또다른 학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정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이해하고 확산하려는 분들의 대화는 저 자신의 안이함을 반성하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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