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물

‘정조’ 태그가 지정된 글

정조의 개혁 기법 속에 현대의 경영기법이 그대로 적용됨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11월 15, 2011 댓글 남기기

최근 일이 너무 많아, 정조의 내용 정리를 2회차나 올리지 못했네요. 어제 강의 내용마저 정리를 못하면 저만 알고 묻혀버릴 것 같아 우선 이 내용을 먼저 정리합니다.

정조의 시대는 태조/태종의 창업시대 > 세종/성종의 수성시대를 겨처 영조의 대를 이어 경장更張의 정치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경장이란 거문거의 줄을 고친다/조인다의 의미로 시대적 상황이 사회 전반에 걸친 시스템을 개혁해야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를 위해 정조가 해결하기 위한 비유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나라를 치료하는 것과 같다. 유추해보면 배울 것이 많다”며 ▲ 진단,  ▲ 지향목표/비전, ▲ 처방의 순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치국을 한다라고 함은 나라의 병을 다스리는 일로써 이를 진단하여 목표(비전)을 수립하고 처방을 내려하는 구조로, 대표적인 예가 정조의 7대 연설 중의 하나인 경장대고 (정조 2/6/4) 이다.  이를 요약하는 것 보다는 실록의 원문을 그대로 살려 임기 3년만에(세종은 4-5년간 상왕 태종의 밑에서 삼가고 조심하면서 국왕 수습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좀 길긴하지만, 그 220년 전의 조선의 시대상황과, 정조가 이를  어떻게 진단하고, 목표/비전을 수립하여, 향후 20년간의 경장/국가운영을 추진하는 뼈대가되는지에 대해 직접 같이 느꼈으면 합니다.

 

민산·인재·융정·재용에 관한 대고를 선포하다 (경장대고, 1778년 정조 2/6/4)

 

[배경]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받고, 대고(大誥)를 선포하기를,
“과인(寡人)이 열조(列祖)의 큰 서업(緖業)을 이어받았기에 낮이나 밤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기를 마치 깊은 못의 얼음을 밟듯이 해 온 지 이제 3년이 되었다.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을 부묘(祔廟)하는 예제(禮制)가 이미 끝나고 의문(儀文)도 즉길(卽吉)했으므로, 이에 곤면(袞冕) 차림에 종고(鍾鼓)를 차리고서 태묘(太廟)를 지알(祗謁)한 다음에 군신(群臣)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이 예식(禮式)은 곧 선왕(先王)들의 예법이다. 오직 소자(小子) 내가 선왕의 자리에 서서 선왕의 백성에게 임하게 되었으니, 감히 선왕의 마음과 같이 마음을 먹고 선왕의 정사(政事)와 같이 정사를 하여 우리 선왕께서 뜻하시던 일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제 일초(一初)의 처음을 꾀하는 기회를 당했으니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마땅히 서로 닦아 가는 도리를 힘써야 한다. 이에 대궐 뜰에서 탄고(誕誥)하게 된 것이다. 그 조목에는 무릇 네 가지가 있는데 민산(民産)과 인재(人材)와 융정(戎政)과 재용(財用)에 관한 것이다.

[민산 民産: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겠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무릇 그 사람들을 바로잡아 가는데 이미 부유해지게 해주어야 바야흐로 착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였고, ‘백성의 살림살이를 제정(制定)하는 데에는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상고(上古)의 정전(井田)1304) 의 법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고, 오직 명전(名田)1305) 한 가지 일이 가장 근고(近古)의 것인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래에는 일찍이 시행하지 않았다.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땅덩이가 편소(褊小)한데다가 산과 계곡이 대부분이어서 정전(井田)의 경계(經界)를 설시(設施)하기 어렵기도 하고 호우(豪右)1306) 들이 모두 제것으로 만들고 있기에, 조종조(祖宗朝)의 융성(隆盛)한 시절부터 균전(均田)이나 양전(量田)의 의논을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었으니, 대개 풍습이 된 세속을 고치기도 어렵고 뭇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민생들의 먹고 사는 길이 오직 부지런히 농사 짓는 데 달려 있건만 사람들이 각기 제 전토(田土)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다면, 비록 힘을 다하려고 한들 어떻게 하게 될 수 있겠느냐?
공업(工業)과 상업(商業)은 말단의 직무이지만 민생들이 이를 힘 입어 의식(衣食)을 유족하게 하여 오히려 이용 후생(利用厚生)하는 거리로 삼고, 천택(川澤)의 생리(生利)로 말하면 바닷가의 지역에서도촉고(數罟)1307) 를 쓰지 않고 있음은 시기(時期)에 맞추어서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곧 민생들의 힘이 고갈되어 버리고 국가의 부세(賦稅)가 무겁게 되어서이다. 또 동남쪽 바다에서의 어산(魚産)이 대부분 요동(遼東)과 발해(渤海)로 돌아가버리게 된 것은 지리(地理)의 변천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느냐? 초채(樵採)의 생업(生業)으로 말하건대, 그전에는 우거져 있던 것들이 지금은 민둥민둥하게 되었으니, 이는 궁방(宮房)들이 마구 점유(占有)해서가 아니면 아문(衙門)들이 양탈(攘奪)해서임을 알 수 있다. 저 가마솥을 씻어 놓고 땔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 속에서 간신히 구득해 온 것이 또한 얼마나 될 수 있겠느냐? 방적(紡績)의 여공(女工)으로 말하건대, 열 손가락에서 생산되는 것이 모두 현관(縣官)에게 실어다 주어버리게 되고, 앙병(盎甁)의 저축으로 말하건대, 백묘(百畝) 농사의 나머지가 과부(寡婦)에게 미치지 못하게 된다.
아! 한 도(道)를 안찰(按察)하고 그 고을을 맡은 신하들이 이미 자신이 직책을 다하여 민생들의 심지(心志)를 안정되게 하지 못하고 따라서 탐묵(貪墨)한 아전들이 문부(文簿)를 농간하여 사리(射利)1308)하느라 살갗을 방망이질하여 골수(骨髓)를 긁어내므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군적에 올림[簽丁]이 젖먹는 어린이에도 미치어 아이들도 면하지 못하게 되고 저 백골(白骨)에게도 징세(徵稅)하여 향당(鄕黨) 전체가 곤궁하게 된다. 향리(鄕里)에서 무단(武斷)1309) 하는 짓을 하고 우민(愚民)에게 잔학(殘虐)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자못 강동(江東)의 삼해(三害)보다도 심하게 되는데, 무릇 이러한 폐단을 하나하나 들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사설(司設)의 상평창(常平倉)에 명칭이 토포(討捕)라는 제민사(濟民使)를 두어,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등급을 구분하는 격식(格式)을 반포하고 겨울이 다 가고 나면 봉납(捧納)을 정지하도록 하는 영을 내리게 하고 있다. 또한 그 해에 흉년이 들면 곡식을 옮겨 오고 경사(慶事)를 만나면 전조(田租)를 감해 줌은 수해(水害)와 한해(旱害)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요, 도적(盜賊)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며, 민생의 기아(飢餓)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요, 낙(樂)을 민생들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다마는, 이는 모두가 소소한 혜택인 것이니 어찌 민생들의 살림살이를 제정(制定)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근본에 있어 힘쓰라고 한다면 어찌 그렇게 할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비록 일명(一命)1310) 의 사(士)라 하더라도 진실로 애물(愛物)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구제(救濟)해 가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고 한 것이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인재 人材: 인재를 양성하겠다.]


《시경(詩經)》에 ‘여러 왕(王)은 길사(吉士)가 많다.’고 했었거니와, 인재(人材)를 성취(成就)시키는 것은 반드시 교육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태상(太上)에는 빈흥(賓興)1311) 을 하였고 그 다음은 향거(鄕擧)1312) 인데,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로 내려오면서는 오로지 과거(科擧) 제도를 숭상하게 되었다.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서로 계승해 오며 유현(儒賢)들이 배출(輩出)하게 되었기에, 그 시절에는 낭묘(廊廟)의 인재(人材)도 있고 간성(干城)의 인재도 있으며 방악(方岳)의 인재도 있었고, 백집사(百執事)들에 있어서도 모두 적재(適材)를 임용(任用)하게 되어, 조정에는 휘정(彙征)1313) 하는 미덕(美德)이 있게 되고 초야(草野)에는 유일(遺逸)의 한탄이 없게 되어, 인재가 일어남이 이제서야 융성(隆盛)하게 되었었다.
아! 인재를 작성(作成)하는 방도는 오직 배양(培養)과 교육인 것인데, 평소에 배양이 있지도 못하고 교육하는 방법이 있지도 못하여 이미 덕(德)과 문예를 훈적(訓迪)해 가는 것이 없고 단지 과목(科目)으로만 취사(取捨)하고 있는데, 고시(考試)를 두고 말을 하자면 조정에서는 매양 고관(考官)들을 의심하고 있고 고관들은 문득 사자(士子)들을 속이는 짓을 하고 있다. 상하(上下)가 이처럼 믿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 어떻게 준수(俊秀)한 영재(英才) 들을 찾아내어 국가의 수용(需用)이 되기를 바랄수 있겠느냐?
현관(賢關)1314) 은 수선(首善)의 자리인 것인데 경서(經書)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하겠고, 상서(庠序)는 인재를 배양하는 본거지(本據地)인데 한갓 문사(文詞)만 숭상하는 데가 되어버려, 순후한 세속(世俗)이 더욱 투박해지고 홍장(鴻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무과(武科)나 의과(醫科)나 역과(譯科)나 음양 율력과(陰陽律曆科)에 있어서도 모두 폐단이 그러하여 다같이 똑같은 전철(前轍)을 답습(踏襲)하고 있다. 전선(銓選)으로 말하건대, 감별(鑑別)하는 지혜는 밝지 못하고 요행(僥倖)을 노리는 문만 크게 열리어 출척(黜陟)은 고적(考績)을 따르지 않고 주의(注擬)는 관(官)을 위한다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청현(淸顯)의 관함(官銜)은 어느 시대에 시작된 것인지 경상(卿相)의 진출(進出)을 매개(媒介)하는 계제(階梯)가 되어 있고, 지벌(地閥)에 따라 임용(任用)함은 더없이 의의(意義)가 없는 것으로서 한준(寒畯)1315) 들은 발신(發身)할 길이 없게 만드는 일이다. 교육(敎育)과 전선(銓選)의 방법이 위와 같이 잘못되어 있으니, 비록 다스려진 세상을 이루려고 하더라도 또한 어긋나지 않겠느냐?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자급(資級)을 따르는 법은 외람(猥濫)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견서(甄敍)1316) 의 규정은 침체(沈滯)되어 있는 사람을 소통(疏通)시키기 위한 것이다. 염절(廉節)의 포양(褒揚)은 자손에게까지 미치고 탐묵(貪墨)의 징계는 죽을 때까지 이르며, 정부(政府)에서는 방백(方伯)의 인재를 추천하고 번신(藩臣)은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해 왔는데, 이는 모두가 말절(末節)의 것이니, 어찌 인재를 성취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근본에 있어 힘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런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주(周)나라 문왕이 수고(壽考)하는데 어찌 인재를 진작시키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용정 戎政: 국방을 개혁하겠다.]


《역경(易經)》에 ‘문을 겹으로 달고 딱다기를 쳐서[擊柝] 폭객(暴客)을 대비(待備)한다.’고 했다. 융정(戎政)을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제치(制置)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성주(成周) 시대의 군사는 사도(司徒)에 병적(兵籍)을 두고 사마(司馬)에 소속했었으니, 군사를 농군(農軍)에다 붙여 놓았던 것이다.한(漢)나라의 남군(南軍)·북군(北軍)과 당(唐)나라의 16위(衛)와 송(宋)나라의 동·서반(東西班)과 황조(皇朝)의 12위(衛)는 다같이 장단(長短)의 구별이 있은 것으로서, 농군과 군사가 이때부터 구분되어졌던 것이다.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문치(文治)로 나라를 세우고 무략(武略)도 또한 갖추었었다. 부병(府兵)에서 삼군(三軍)이 되고 삼군에서 오위(五衛)로 했었는데, 내부(內部)에는 총관(摠管)을 두고 외부에는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각각 통령(統領)을 두고 병마(兵馬)가 일체(一體)가 되었었으며, 관(官)이 늠희(廩餼)를 허비하는 것이 없고 군사는 정예(精銳)의 칭호가 있다. 비록 고려 말기(末期)의 폐단을 징계 삼았던 것이나 또한 주(周)나라 초기(初期)의 법을 모방했던 것이다. 이러므로 수비(守備)를 굳건하게 하고 공격을 하면 이기게 되었던 것이며, 임진년1317) 이후에는 비로소 훈국(訓局)을 두었는데 이로부터 분군(分軍)의 제도가 만들어지고 드디어 오위(五衛)를 폐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듭 모병(募兵)하여 영(營)을 설치하고 부(部)를 나누어 국(局)을 설치하고, 또 기보(畿輔)의 군사를 갈라서 거느리게 하고서는 혹은 병사(兵使)라 부르고 혹은 대장(大將)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이는 모두 다 조치(措置)가 번잡하게 되고 연혁(沿革)이 무상(無常)하게 된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곤외(閫外)를 절도(節度)해 가는 제도가 혼란스러워 기강이 없고 곤내(閫內)에 비하여 더욱 몇 갑절이나 되었다.
제승(制勝)의 방략(方略)을 두고 말하면 장수는 범처럼 굳센 위엄이 없고 군사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되는 염려가 있었으며, 삼군(三軍)을 오영(五營)에 나누어 소속하고서 이 오영이 각기 하나씩의 영을 전관(專管)하였으니, 군사가 가병(家兵)의 폐단이 다문(多門)하게 되는 염려에 가깝지 않겠느냐? 연습(鍊習)하는 방법을 두고 말한다면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손빈(孫殯)·오기(吳起)의 병서(兵書)는 고각(高閣)에 묶어 놓고서 장조(場操)와 수조(水操)의 격식은 문득 아이들의 놀이처럼 여기게 되었다. 대개 척법(戚法)이 나오면서는 옛적의 제도가 무너져버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소위 왜적(倭賊)들을 방어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오히려 방도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거든, 더구나 사방 국경(國境)에 있어서의 미리 대비하는 군적(軍籍)을 두고 말한다면 한정(閑丁)이 날마다 줄어들게 되고, 마정(馬政)으로 말한다면 목축(牧畜)이 번성하게 되지 못하며, 양병(養兵)하는 방도로 말한다면 군향(軍餉)도 배포(配布)하고 군보(軍保)도 설시하여 법 세우기를 처음부터 치밀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더 거두는 폐단이 흘러 오게 되어 온 나라 재부(財賦)의 절반을 가져다가 하나의 미려(尾閭)1318) 와 같은 데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변방에 전진(戰塵)의 경보(警報)가 있게 되어 우격(羽檄)1319) 이 방오(旁午)1320) 하게 된다면, 이와 같은 제치(制置)로는 비록 옛적의 명장(名將)에게 곤외(閫外)의 임무를 맡게 한다 하더라도 계책과 방략(方略)을 펴가게 되지 못할 것이 뻔하니, 참으로 이른바 ‘근본이 올바르지 못하면 말단에서는 구제해 갈 수 없는 것이라.’고 한 말과 같은 일이다.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일성(日省)과 월시(月試)는 강습(講習)시키기 위한 것이고, 상(賞)을 후하게 주고 벌을 가볍게 함은 격려(激勵)하기 위한 것이며, 천경(踐更)1321) 은 노력과 휴식을 균등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호군(犒軍)은 고락(苦樂)을 같이하기 위한 것이다. 영(營)에는 각각 장수를 두되 대신(大臣)이 영도(領導)하고 문사(文士)가 보좌(補佐)하게 하였고, 대소(大小)의 영진(營鎭)에 있어서도 다같이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두어 각기 서로 유지(維持)해 가고 견제(牽制)해 가도록 했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마는, 어찌 융정(戎政)을 잘 다스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근본을 힘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만한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하였으니, 그렇게 되어지지 않겠느냐?

[재용 財用: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겠다]



경서(經書)에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길은 반드시 저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夏)나라에는 공법(貢法)을 쓰고 은(殷)나라는 조법(助法)을 쓰고, 주(周)나라는 철법(徹法)을 쓰고, 한(漢)나라는 삼십세법(三十稅法)을 쓰고, 당(唐)나라는 조용법(租庸法)을 썼으니, 시대마다 각각 제도가 달랐지만 모두가 아랫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우리 동방(東方)에 있어서는 그 땅에서 나는 것에 따르며 토질(土質)의 비옥(肥沃)을 구별해서 그 등급을 세 가지로 하되, 부(賦)에다가 공법(貢法)을 섞어서 하여 공(貢)과 부(賦)가 균등하게 되어 있다. 이래서 국가에는 항시 저축(儲蓄)이 있게 되고 민생들은 생업(生業)을 즐거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경비의 용도(用度)가 점차로 넓어져 공용(公用)이나 사용(私用)이 다 같이 곤란해지므로, 재물을 거두어 들이는 방도에 있어서 이미 남기어 놓는 것이 없이 하게 되었고, 재물을 소모하는 길에 있어서도 거의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탕저(帑儲)로 말하건대, 한 해의 수입이 한 해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용관(冗官)과 용병(冗兵)들이 먹는 것이 10에 7, 8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기 관부(官府)를 두고서 전곡(錢穀)을 나누어서 관장(管掌)하게 되어, 판조(版曹)에서 지출과 수입의 액수(額數)를 전관(專管)하지 못하게 되고, 혜국(惠局)에서도 대소(大小)의 공급을 관할할 수 없게 되었다. 폐해가 잘못을 답습(踏襲)하는 데에 있게 된 것인데도 폐단이 고질이 되어 그대로 인순(因循)하고 있다. 창름(倉廩)의 평적(平糴)과 화조(和糶)로 말하건대, 제도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미 오래도록 연습(沿襲)해 오면서 옛적 본래의 뜻이 점차로 없어지게 되고, 적렴 조산(糴斂糶散)이 합당하게 되지 못하여 탐심(貪心)을 부리는 폐단스러운 법이 되어버렸다. 안으로는 경사(京司)와 밖으로는 열읍(列邑)들의 부정(不正)을 저지르는 명목(名目)과 근거가 없는 명색(名色)이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계책은 먹을 것이 있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도리어 민생들이 해독을 받게 된 것이다. 비기(肥己)하는 폐해가 점차로 퍼지며 따라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게 되었으니, 이러고서는 비록 날마다 포리(逋吏)들을 죄주고 날마다 곤궁한 백성을 독촉을 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느냐?
정각(征榷)1322) 으로 말을 한다면, 관시(關市)에서 정세(征稅)하지 아니하고 택량(澤梁)을 금단하지 아니하였음은, 성왕(聖王)들이 백성들과 함께 이득을 다 같이 보기 위한 뜻이었다. 오늘날 어선(漁船)에는 장척(丈尺)에 따라 세(稅)가 있고 염부(鹽釜)에도 대소(大小)를 정하여 징세(徵稅)하고, 동·철(銅鐵)과 은·연(銀鉛)에도 모두 징수하고 있으며, 민결(民結)과 신포(身布)에 이르기까지 정세(征稅)하지 않는 이득이 없게 되고 정각(征榷)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는 신포(身布)를 감해 주고 대신으로 보충하는 수를 하는 일에서 연유하게 된 것이니, 선왕(先王)들의 뜻이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겠느냐? 이러므로 선왕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균역(均役) 한 가지 일은 곧 나의 사업(事業)이다마는 그래도 인정(人情)에 잘 맞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일을 주간(主幹)할 신하들의 자손이 흥(興)하게 되는지 쇠(衰)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 착한 일인지 착하지 못한 일인지를 증험하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거룩하신 성인의 말씀이셨으니 오직 과인(寡人)은 다만 마땅히 그대로 준수(遵守)해 가고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갖추어져 있는 규례(規例)를 들어 말하건대, 달마다 회계(會計)를 하게 되어 있고 해마다 감부(勘簿)를 하게 되어 있음은 미려(尾閭)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관세(官稅)를 혁파하고 공상(貢上) 명목(名目)을 감하였음은 절생(節省)을 힘쓰기 위한 것이다. 이는 모두가 미세한 일인 것이니 어찌 재용(財用)의 넉넉함이 있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근본을 힘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만한 방도가 없겠느냐? 그러기에 ‘재화(財貨)를 생산하는 데 큰 방도가 있나니, 생산하는 사람은 많고 소비하는 사람은 적으며, 일을 하는 자는 빨리 하고 쓰는 자는 천천히 한다면 재물이 항시 풍족하게 된다.’는 것이니, 그렇지 않겠느냐?

[결론:경장(更張), 소강(小康)]

대저 총합(總合)하여 말한다면 당면한 지금의 폐해는 한 가지만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병이 든 사람이 진원(眞元)이 이미 허약하여 혈맥(血脈)이 막혀버리고 혹이 불거지게 된 것과 같은 꼴이다. 기강(紀綱)이 문란해져 당폐(堂陛)가 존엄(尊嚴)해지지 못하고, 언로(言路)가 막히어 강직(剛直)한 말을 들을 수 없으며, 난역(亂逆)이 잇달아 생겨나 의리가 더욱 어두워졌으니, 무어 위태한 증상(症狀)이 조석(朝夕) 사이에 박두해 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는데도, 이번에 특별히 네 가지 조목을 들게 된 까닭은 진실로 방본(邦本)을 굳건해지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근본이 굳건해지게 하는 것은 민생에게 있고, 민생들을 배양(培養)하는 것은 먹을 것에 달린 것인데, 먹을 것이 족해지면 교육해야 하고 이미 교육하면 반드시 경계하여 보호해 주고 협조하여 유익하게 해 줄 것이니, 이것이 방가(邦家)를 보존하는 대본(大本)인 것이다.
아! 시험삼아 오늘날의 국가 사세를 보건대, 경장(更張)한다고 해야 하겠느냐? 인순(因循)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느냐? 큰 집이 기울어지게 되면 하나의 목재(木材)로는 지탱할 수 없는 것이고, 온갖 내가 터지게 되면 쪽배로는 막기가 어려운 것이다. 삼대(三代) 시절의 제도는 비록 졸급하게 복구(復舊)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소강(小康)의 다스림도 또한 기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증세에 대처할 약제(藥劑)를 알지 못하여 손을 댈 방법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어찌 하지 않고 있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핑계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될 적마다 과인(寡人)의 마음이 진실로 근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과인의 뜻이 확립되지 못해서이고 과인의 학문이 이루어지지 못해서이니, 진실로 허물을 잡아내기로 한다면 오로지 나 일인(一人)에게 달려 있게 된다. 아! 임금은 마땅히 말을 간단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이처럼 그칠 줄 모르고 순복(諄複)하게 되는 까닭은 자세하게 이르려고 하여 말이 번거롭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이(所以)로 선왕(先王)의 대도(大道)를 강구(講究)하고 선왕의 구장(舊章)을 수복(修復)하여, 우리 선왕께서 부여하신 책임을 저버리게 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함께 다스려 가는 여러 현명한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가 깊다. 아! 너희 조정에 있는 군료(群僚)들은 혹시 과인의 분부를 공언(空言)으로 여기지 않고 국가 일을 걱정하기를 가정 일처럼 하여 앞에 말을 한 실속을 힘쓰는 방법으로써 나 과인을 계적(啓迪)해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선포(宣布)가 끝나고, 동·서반(東西班) 및 시위(侍衛)하고 있는 제신(諸臣)과 위졸(衛卒)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들 진주(進奏)하도록 명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은 수령(守令)에 초사(初仕)하는 자를 잘 선택하라 청하고,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은 제도(諸道)에서 세초(歲初)에 인재를 추천하되 전조(銓曹)를 선칙하여 검토해서 임용(任用)하기를 청하였으며, 우의정 서명선(徐命善)은 삼관(三館)의 참상(參上)이 적체(積滯)되어 있으니 전조로 하여금 소통(疏通)시키는 정사(政事)를 힘쓰게 하기를 청하였고,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는 본조(本曹)에서 전후에 등록(謄錄)해 놓은 것을 모아서 한 가지의 서책(書冊)으로 만들어 고거(考據)에 대비(待備)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구선복(具善復)은 각도(各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속오군(束伍軍)을 단속하는 병정(兵政)을 이정(釐正)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후 정조의 경장 개혁 중 군대겨혁, 신해통공, 화성건설은 성공을 하였고, 관료제개혁은 미흡, 노비혁마 및 서얼차별제는 미완으로 끝났다고 하며, 이중 신해통공 및 서얼차별제도에 대해 자세히 진단/비전/처방/결과의 순서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정조의 7대 연설문으로 1) 즉위윤음, 2) 탕평윤음, 3) 경장대고, 4) 신해통공윤음, 5) 화성축성중단윤음, 6) 오회연교, 7) -숙제- 라고 합니다. 다 ‘정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연설들이니 꼭 일독을 권합니다.

 

 

 

정조의 규장각과 경연을 통한 溫故知新 주체적 지식경영

10월 18, 2011 댓글 남기기

박현모 교수님께서 진행하시는 정조이야기 제4강 수업 공유합니다.

이번 10월14일에 열린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문 중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한 사회의 궁극적인 권력의 원천은 바로 국민 자신”이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이러한 가치는 한국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성군으로 존경받는 세종대왕은 약 600년 전 “백성이 하늘이고, 민심이 곧 천심이다. 하늘처럼 백성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목이  세종리더십연구소의 학술대회 내용을 인용한거라 하시며, 세종의 국가 경영 철학과 방식이 널리 퍼지는 것이 느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규장각을 통한 지식 경영

정조의 리더십/경영기법을 이야기할 때 세종대왕과 많이 비교를하면서,  세종은 소를 뒤에서 유도하는 스타일이라면, 정조는 소를 앞에서 끄는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리더십을 부리는 주요 정책의 하나가 싱크탱크인 규장각을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규장각이 있는 건물의 이름을 주합루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과 땅을 잠는 자루라는 뜻이라고 하며,  출입무인 “어수문”은  백성은 임을을 띄울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 입니다.

주합루 어수문

사진출처 : http://hanulh.egloos.com/4348079

 

정조는 개혁의 조건으로 개혁의 명분과 청사진을 그리는 비전을 내세우고, 이를 위한 지지세력 규합이 필요습니다.  이를 구체화는 전략으로 ▲  문명의 정치  ▲ 국왕의 정치기반 구축 ▲ 신하와 벗 ▲ 탕평을 내세워 규장각을 설립했습니다.  이렇게 설립된 규장각은 (1) 도서의 수집과 편찬 ,  (2) 국왕의 고전 강독 및 국정 자문 , (3) 제도개혁 추진 , (4) 초계문신/ 과거에 급제한 인물을 재교육 시키는  등 역할을 넓혀나갔습니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습니다. ‘우문지치’가 사대부를 가까이하는 정치라면, ‘작인지화’는 인재를 변화시키고 고무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초계문신은 정조 5년(1781)에 16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24년까지 11회에 걸쳐 모두 142명이 선발되어 나라의 Think Tank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 당시 사람들에 의해 대단한 선망이 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제6회 출신으로 이때부터 정조와 연을 맺어 갑니다.

규장각이 잘 흘러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끄는 방식을 선호했던 정조는 軍師로써 임금이자 스승으로써 신하들을 대했으며,  이택징의 사신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정도는 세종대왕의 집현적 학사들 예를 들어 친신/근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조속목의 우물안 개구리 같이 옛것/국내일만 살핀다는 간언과, 정약용의 초계문신제를 비판 항의식 건의도 받아야 했습니다.

 

 

경연을 통해 날개를 이루다.

조선시대의 왕은 ‘경연’이라는 제도에 의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아침, 오후, 저녁에 삼시간으로 법강을 이뤘으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강/보강, 밤에 열리는 소대/야대도 있었습니다.

정조 때에는 말을 통해서 의심을 일으키게하고,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심을 풀게하여, 마침내 사람의 착한 본심을 느끼고/돌아가게끔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전달형으로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져 스스로 깨닿게 하며 교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합니다.

이때 정조의 중요 철학을 하나 설명해 주십니다.

溫故知新 온고지신 옛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

유행한 것을 일삼는 것이 아닌, 우리의 안목을 높혀서 어떠한 신규 사상이 들어오더라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주체정신이 중요하다고도 말씀해주십니다.

 

 

어록

대개 학문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고, 우주의 일은 모두 내 직분안의 일이며, 전곡(錢穀)과 군대는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풍토는 자기만 알고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심지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같은 것은 쓸데없는 일로 여기고 있기까지 하니, 이래서야 나라가 무엇을 믿겠는가.”  - 정조 20/10/22

 

 

느낌

정조는 왕이 된 후에 새로운 개혁을 펼치기 위대 꾸준히  규장각과 경연을 통해 文문을 익히고, 溫故知新 온고지신 할 수 있었습니다. 규장각 반대 상소에도 세종의 예와, 역사속에서의 사례를 논리정연하게 펼처 꾸준히 자신의 정치 위상을 갖추기 위해 펼치는 전술에서 여러가지를 배우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 Think Tank가 중요하고 이를 위한 인재 등용과 매일 3번의 경연으로 근본과 역사를 통한 사례연구 토론 발표를 통해 서로 교화가 되어감과 동시에,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간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10월 12, 2011 1개의 댓글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주관 제3회 세종학국제학술회(대주제: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를 참관하고 기록을 남깁니다.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한글의 탄생 智의 혁명 – 노마 히데끼 , 일본 국제교양대학 교수

제1회의 세종리더십 비교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교수님 주관)

  • 당태종과 세종대왕 – 고려대 김택민 교수
  • 정조의 탕평 정치와 세종 – 단국대 김문식 교수
  • 한국의 세계화와 세종의 재조명 : 토마스 재퍼슨을 중심으로 – 조지메이슨대 노영찬 교수
  • 토론 – 서울대 박한제 교수,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뱅승종 대표, 경희대 이동수 교수

경복궁 내 경회루 답사 및 숙명가야금연주단 (신치화평)

제2회의 세종리더십의 핵심개념 – 숙명여대 송혜진 교수

  • 세종대왕의 리더십행동상 특징에 관한 연구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윤재 교수
  • 세종의 중용 리더십에 관한 일고찰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병련 교수
  • 세종의 실용사대의 외교리더십 –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
  • 세종의 민본정치 –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연구실장
  • 토론 – 한국교원대 김주성 교수,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연세대 국학연구원 이원택 교수, 국회입법조사처 이현출 팀장

 

 

한글의 탄생 智의 혁명 – 노마 히데끼 , 일본 국제교양대학 교수

일본인이시면서 “한글의 탄생” 책을 출간하신 노마 교수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일본 및 해외에서 한글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음이 문자가 되는’ 훈민정음의 “지智”의 의미에 대해 강조하셨다. 중요한 것은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智”에서 벗어나 쓰는 것과 쓰여지는 것 즉 에크리튀르 ecriture 의 혁명이며, 이는 또 다른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 내는 게슈탈트 Gestalt의 혁명이라고를 강조하셨다.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제1회의 세종리더십 비교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교수님 주관)

당태종과 세종대왕 – 고려대 김택민 교수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당 태종은 창업과 수성 정치 가운데 태종은 왕조 창업에 성공했더라도 수성할 수 있는 뛰어난 군주가 출현해서 근검한 자세로 제도를 갖추어 체제를 안정시키지 않으면 왕조의 조명이 오래 이어질 수 없다는 논리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당 태종과 세종대왕은 군주 자신이 근검하는 정사를 펼침으로써 모범이 된 점, 포용력 있는 인재를 등용한 점, 현인을 등용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직무를 맡긴 점, 포용성을 보이면서도 과단성 있게 대외 정책을 전개한 점이 공통점이라고 언급하셨다. 즉 통치자와 현명한 관리들이 시대의 추세와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현실에서 구현한 것이 치세를 이루는 비결이라고 한다.

 

1. 근원이 깨끗한 정치

당 태종은 정치 철학을 아래와 같이 어록으로 설명하였다.

“군주가 된 자의 도리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오. 백성을 해치면서 자신을 받들게 하는 것은 넓적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으니 배는 부르나 몸은 죽소. 만약 천하를 편안케 하려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해야 하오. 몸이 바른데 그름자가 굽거나 위가 가지런한데 아래가 어지러운 경우는 없소..

이는 ’순자’의 군도편으로 군주의 덕목의 첫째는 믿음이다. 군주가 권모술수를 부리기를 좋아하면 신하와 관리, 거짓을 일삼는 사람까지 이를 틈타서 남을 속일 일이다. 둘째는 공정무사함이다. 군주가 편애하기를 좋아한다면 신하와 관리들이 이를 틈타서 편향된 짓을 할 것이다. 셋째는 공평함이다. 군주가 공평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평가를 뒤엎기를 좋아하면 신하와 관리들은 이를 틈타서 원칙을 뒤엎는 모험을 할 것이다. 넷째는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군주가 이익을 탐하면 신하와 관리들은 이를 틈타서 민을 갈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민의 근원이다. 근원이 맑으면 물줄기도 맑으며, 근원이 흐리면 물줄기도 흐리다. 君者、民之源也,源清则流清,源浊则流浊 라고 하였다.

짐은 늘 그 몸을 상하게 하는 요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탐욕이 화를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소. 만약 맛있는 음식을 탐하고 가무와 미녀에 지나치게 빠진다면 잃는 바도 클 것이고,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어지럽게 할 것이오. 또한 한 마디라도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만백성은 그로인해 마음이 멀어지고 원한과 비방이 만들어지고 이반 또한 일어날 것이오 짐은 매번 이를 생각하여 감히 방탕할 수 없었소.

군주는 배이고, 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엎을 수도 있다. (공자,  고기는 물을 잃으면 죽지만, 물은 고기를 잃어도 물일 뿐이다. )

 

세종 역시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해, 취미가 공부라 할 정도로 부저런히 공부해서 섭력하지 않은 전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항상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되는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으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또한 술은 해독이 심한 것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의지를 손상시키고 위엄을 잃게하기 때문에 삼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보고 스스로 실천하셨다고 한다.

 

2. 폭넓게 인재를 등용하는 포용 정치

명군은 하나 같이 넓은 포용력을 보이는 공통점을 언급하였다. 당 태종의 경우 ‘위징’을 세종대왕의 경우 황희와 장영실을 예로 드셨다. 황희의 경우 서얼출신/뇌물수수혐의/간통혐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을 간파하고 등용하여 조선 최고의 재상이 게 한 점과, 재상으로 임용한 뒤에는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전적으로 조정을 이끌어가는 책임을 맡겼다고 한다.  노비 출신 장영실을 등용하여 과학적 재능을 발휘한 일. 양수척 신분의 천인의 집에서 자란 최윤적을 등용해서 압록강 유역의 영토를 개척한 일 등등 많은 사례가 있다고 했다. 세종이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이 넓은 포용성으로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3. 현인을 등용해서 간언을 듣는 정치

당 태종은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비춰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듯이 군주가 자신의 과오를 알려면 반드시 충신에 의지해야 한다. 군주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하면 어느 신하가 간언을 하겠는가 라든가.. 명군은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데 반해 암군은 원하는 의견만 듣고 믿는다고 확신했다.

 

세종은 자유로운 회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말하면 들어주고 계책을 내면 시행되었으며, 알고 있는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 없는” 분위기가 깨질 것을 염려했다.  또한 세종은 아첨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했다. 아부를 듣는 순간 위험에 빠진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세종은 ‘대학연의’ 중에 우문사급이 “황제의 아름다운 정원에 감탄했다”하는 대목에 이으로 “예로부터 간사하고 아첨을 하는 신하가 김금에게 아양을 부리는 형상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그 신명을 끝까지 보존한 자가 없었다”라고 말하여 충성경쟁을 일삼는 박은에게 일침을 가한 일도 있다.

 

4. 포용성과 과단성으로 대처하는 대외정책

당 태종 및 세종 모두 포용성 및 과단성 정책을 펼쳤는데, 세종의 경우 노력질하는 왜구에게는 교역할 수 있는 권한과 세사미를 주어 회유함으로 노략을을 막을 숭 씨었고, 여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공세를 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를 개척했다.

 

 

정조의 탕평 정치와 세종 – 단국대 김문식 교수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1. 정조가 중시한 호,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2. 인재는 가자의 능력에 따라 쓴다.

3. 정책의 시행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

4. 모든 정파를 포용하는 군주

5. 정조의 탕평 정치에서 수용할 점

6. 세종과 정조의 비교

세종과 정조의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점을 설명해주셨다. 우선 20대의 젊은 나이에 국왕이 된 점과 그때 이미 상당 수준의 학문 견지에 있었다고 한다. 국왕이 책을 보는 학자의 모습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다음으로 우수한 학자들을 모아 국가 정책을 연구하는 집현전/규장각 같은 싱크 탱크를 운영하면서, 이곳에서 연구한 결과를 다수의 서적으로 출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세종의 시기가 창업기였고, 경국대전/국조오례의/악학궤범 같은 예제와 법제가 만들어진 반명, 정주는 수성기의 국왕으로 17세기 외국과의 큰 전쟁 이후에 무너진 국가의 틀을 재건하는 과제와, 이 국가의 틀은 어떻게 수리하여 지속시켜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였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합하여 대전통편을, 그리고 국조오례의와 속오례의를 합쳐 춘광통고를 만들었다.

 

세종에 비해 정조는 정치적 발언이 강하고 독단적인 모습이 강했다. 세종이 창업기인 15세기의 결실을 거둔 국왕이라면, 정조는 재건기인 18세기의 결실을 거둔 국광이면서 학자군자라는 점이 비슷하지만 시대적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다.

 

 

한국의 세계화와 세종의 재조명 : 토마스 재퍼슨을 중심으로 – 조지메이슨대 노영찬 교수

New Korea,

Korea beyond Korea

미국이 국가적 위기를 당한다거나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할 때가 온다거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정신적 고무 받기를 위해서 반드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슬로건으로 미국의 건국이념이나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새롭게 찾고 해석에서 국민들에게 앞으로 갈 길을 제시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나 토마스 제퍼슨은 각각 그 나라의 기초를 세운 왕이자, 대통령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인본주의에 입각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우해 누구든지 읽고 쓰는 문맹자가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민들이 말과 글을 가지는 것은 특권층이 가지는 사치가 아닌 국민 누구나 가져야할 인간의 기본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배움으로서 참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고 사회가 번영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종이나 뫄스 재퍼슨은 인문학 분 아니라 과학기술에 까지 영역을 넓혀서 깊이 연구하고 학문을 장려함으로서 국가의 토대를 굳건하게 닦았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인문학이나 과학의 연구가 특정 사회계급에 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 까지도 이러한 배움이 가능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인문주의, 과학주의,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세종은 한글을 제창하고 농업기술을 일으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나아질 수 있게 했고, 토마스 제퍼슨은 초창기 미국이 앞으로 세계적인 미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놓아 준 대통령이다.

 

 

세종의 지도정신과 가치관, 그의 민본사상과 과학주의 그리고 한글창제에 따른 인간의 기본적 표현의 자유와 권리는 앞으로 한국이 세계화 하는데 커다른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토론 – 서울대 박한제 교수,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뱅승종 대표, 경희대 이동수 교수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경복궁 내 경회루 답사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숙명가야금연주단 – 신치화평  연주 동영상 보기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제2회의 세종리더십의 핵심개념 – 숙명여대 송혜진 교수

세종대왕의 리더십행동상 특징에 관한 연구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윤재 교수

1. 균형감각 (Sense of Balance)

2. 힘실어주기 (Empowerment)

3. 추진력 (Driving Force)

 

대학의 명명덕(明明德)과 지어지선(止於至善)를 바탕으로 한 “힘실어주기”의 리더십은 “친민 親民’의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세종대왕이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여러 정책들을 힘있게 “추진했다”는 점은 중도(中道)란 그저 생각과 말로 헤아려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분명한 주견을 가지고 몸을 움직이고 선을 드러내고 악을 누르며 일이 마땅하게 되게 하는 것, 즉 실천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는 중도정치의 사례을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정치리더십은 기존의자원동원능력,자질,정책집행능력으로 이해되던 “강력한 리더십”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여 보다 질적인 소프트파워 차원의 요소들이 충실하게 녹아있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하며 마무리를 해주셨다.

 

 

세종의 중용 리더십에 관한 일고찰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병련 교수

1. 상황적 중용

2. 창조적 중용

3. 세종 ‘심법’중용 (지성至誠과 유연성, 유교와 불교, 불편不偏의 중용)과  ’상황’내 정책 중용 (문과 무, 덕치와 형법, 지배층과 비지배층)

의 관점에서 세종을 분석해 주셨다.

 

 

세종의 실용사대의 외교리더십 –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1. 고려 말, 조선 초 대 원/명 관계의 변화

2. 세종대의 사대외교

한중 간의 책봉-조공 관계에서 가장 사대적이며 가장 자주적인 시기가 바로 조선 세종대이다. 세종의 외교는 가장 사대적인 것이 가장 자주적이라는 역설을 담고 있으며, 그 성과는 국내에서 민족문화의 발달과 영토의 확장이라는 실리로써 구현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세종대의 사대외교를 ‘실용사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의 민본정치 –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연구실장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1. ‘민본’ 세종 정치를 꿰뚫고 있는 핵심 개념

2. ‘민본’의 의미와 전거

3. ‘세종의 ‘민본정신’ 실천

실록에 총 29회나 ‘민본’에 관련된 말이 언급되는데

  •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세종 1/2/12; 5/7/3; 5/7/13; 8/5/4)
  •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져서 각기 생생生生하는 즐거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국왕 본연의 임무다. (세종 5/7/3)
  • 임금의 직책음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서 다스리겠는가 (세종9/8/29)
  • 백성들의 뜻이 잘 전달되는 것이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것
  • 백성들의 수명을 길게 하는 일이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 일

 

세종의 돋보이는 실적으로는

  •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
  • 국가의 안전 (중국과의 긴밀한 사대 외교, 왜구/여진에 대한 강력한 토벌, 4군6진의 영토개척)
  •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시간과 문자를 백성들에게 내어준 것

 

세종은 민본정신을 ‘말’에 멈추지 않고 ‘일’을 이루어낸 지도자였다. 세종의 비전은 “백성들이 자기 직업을 즐길 수 있는 민락생생民樂生生 (세종 32/2/17)” 나라를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임금이었다. 세종32년을 크게 여섯 시기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준비(즉위-4년) : 경연개최, 집현전 인재양성, 대마도토벌, 고려사개정

위기(4-8년) : 강원도 대기근/4, 이각 완비난/5, 통전법폐지/7, 한양대화재/8

민생경영(8-12) : 세제개혁제안(공법논의/10), 선진농업기술보급(농사직설/11),과학영농(12)

문화개혁(13-16) : 아악사용(13),수고법개정(15)삼강행실도간행배포(16)

개척개혁(18-28) : 4군6진설치(16), 사민시작(17),의정부서사제(18),2차파저감토(18),훈민정음창제(25),공법확정(26)

시련(28-32) : 두아들,왕비사망 (27/28), 황해도대기근(29),국고바닥(29),내불당논쟁(30),명나라파병요청(31)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토론 – 한국교원대 김주성 교수,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연세대 국학연구원 이원택 교수, 국회입법조사처 이현출 팀장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느낌/마무리

막연하게나마 느낀 세종대왕을 학술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 세종의 근본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세종 대왕의 업적을 이해하니 상호관의 연관성이 보이면서 더욱 인간적인 세종대왕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학구파, ▲ 민본정신으로 중무장한 그의 철학과 이를 ▲ 民樂生生 비전을 심어 모든 중용적 판단하에 일에 전념하신 점, ▲ 부하의 허물을 덮어주고 항상 위임하며, 옆에서 참모/브레인으로 활용하신 점, ▲ 중국/일본/여진족과의 실용적 사대주의, 외교정책 등등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박현모 교수님께서 경복궁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서 설명해주심에, 알고 보는것과 모르고 보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게 부끄럽게 여겨졌네요. 이후 송혜진 교수님이 주관해주신 숙명가야금연주단의 운치있는 국악 연주도 멋졌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우수성은 물론, 그 안에 담겨진 세종대왕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일깨워준 본 세미나에 감사를 느낍니다.

 

모든 세미나를 마치고 조촐한 저녁 식사를 나누며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좌측부터 박현모 교수, 국정호 연구팀장, 노마 히데끼 교수, 김영옥 대표, 송혜진 교수, 김기섭 이사

 

추가. 2011.10.17

제가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멘토링 사업인 상록수 회원 3분도 오셨는데.. 그분들의 후기도 기록 차원에서 남깁니다.

김미영님

한글의 날을 맞이하여 한국학 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제3회 세종학국제 학술회의 ‘세종대왕 리더십의 국제적 비교와 한글의 미래가치’ 에 대한 세미나를 하루종일 참석했었다…세미나 일정중에 점심 후 경복궁을 투어하는 1시간 일정이 있었는데..아!~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기쁨이 크다고!. 스토리가 있는 수정전과 경회루와 강녕전과 근정전과 교태전등..풍수지리의 중요성및 우리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더불어 주체성과 뿌리깊은 우리의 정체성도 알 수 있는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너무나 외모가 깔끔하고 정갈하게 생긴 박현모교수님의 안내로 이뤄진 아주아주 행복한 시간중에 하나!..^^ 
여러 교수님들의 말씀중에 민본정치의 박현모교수님의 강의와 실용사대의 외교 리더십의 이익주교수님의 강의와 한국의 세계화와 세종의 재조명이란 제목으로 토마스 제퍼슨과의 비교를 해주신 미 조지메이슨대 교수님이신 노영찬교수님의 강의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조선이 민주국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정치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했고 더불어 국민에 의한 정치와, 국민의 정치는 하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도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왕권과 신권을 분리조화 시키면서 여러가지 우수한 제도들을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너무나 뛰어난 행정가이면서 과학자이시면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우리의 위대한 세종임금의 리더십에서 가슴깊이 나에게는 큰 뭔가를 심어준 너무나 의미있는 멋진 하루였음에.! 이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게 해준 김태영대표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민언정님

경복궁오랫만에 돌아보며 박현모교수님의 유머에 웃으며 설명들으니 아이들도 이렇게 재밌게 국사를 한다면 얼마나좋을까 싶더군요! 경복궁을 설명을 들으며 다니니 ! 한 곳 곳 마다 스토리텔링이 또 큰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 역사공부는 자신의 뿌리깊은 정체성을 찾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

 

홍순규님

저 자신 우리 역사에 대한 미천한 지식이 부끄러웠습니다..좀더 공부해야 겠어요..그동안 좋은 책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읽어보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좋은 의견을 주신 노영찬교수님, 노마 히데끼님, 백승종 대표님, 이 한우 기자님, 박현모 원장님..모두 감사했습니다. 저는 특히 노 영찬 교수님과 이 한우기자님의 의견에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저도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우리의 글과 정신을 옳바르게 인식하고 바로 세우는 일에 어떤 방법으로 동참할 것인가를 숙고해야겠네요..

 

 

 

 

 

 

 

 

 

 

 

 

 

 

 

 

 

정조 – 멈출(止) 수 있는 힘 / 중용의 철학

9월 28, 2011 댓글 남기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주관  정조이야기 2강 내용 공유합니다.

NewImage
정조의 3대 이미지가 “책, 종, 달”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적 이미지가 바로 그칠 지(止) 입니다. 이미 활쏘기 50발 중 49발을 명중해 놓고도 나머지 1발을 쏘지 않는 이야기로 유명하신데요.

<홍재전서〉 제95권, 경사강의 32(書經). 정조는 장애가 생겼을 때 무시하고 밀고나가는 것(狂)과 장애를 무서워해서 아예 출발도 하지 않는 것(猜) 사이에 있는 중용을 강조했습니다. 그것 은 바로 얼마나 적시에 잘 그칠 수 있느냐(止)에 달려 있습니다. “일에서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 며, 말을 다하려고 하지 말라[重不要做到十分 를不要說十分]“이라는 말도 그칠 지의 용기와 지혜 를 말하는 어록입니다<홍째전서> 161권 일득록 16-24.

정조시대는 문화적 르네상스 중 프로젝트 관계적으로 유심히 봐야할 것이 기록 문화인 것 같습니다. 이미 전세계 최고의 건출 설계서/완료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나 혹은  일성록/홍재전서와 같은 개인의 기록을 매우 꼼꼼히 남기신 점입니다.  정조는 옛 우수한 철학이나 선조의 내용을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하셨는데 대표적으로 다음 도서가 매우 역사적으로 가치가 많다고 합니다.

  1. 성리학자인 송시열의 저서,시문, 상소 무음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2. 조선 건국 기획자 정도전이 평생동안 쓴 글을 모아 편찬한 삼봉집(三峰集)
  3. 현재 거북선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정조를 이해하려면 정조 11살의 나이때 귀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 그리고 영조와의 관계, 아울러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 벽파 및 영조와 50살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15살의 나이에 시집와서 정조와 대립관계를 가지는 정순왕후 김씨(경주김씨, 추사 김정희 선생의 집안)와의 관계를 필히 알아야 합니다.  이를 매우 잘 이야기 형태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이를 해석하는 관점은 두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영조와의 성격적 갈등과 애증, 새옷으로 못갈아 입는 정신병으로 해석하는 정신병리학적 이유, 둘째로는 노론 독주의 정치구도에서 개혁/반대의 입장을 보인 세력관계를 중시하는 정치구조적인 이유로 나뉜다고 합니다. 저는 정치구도적인 면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정조의 정치 노선은 결국 사도세자의 입장을 이어받아 노론을 약화시키고, 조선의 개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孝 와 영조의 직속 후계로 22대 왕이 되어 국사를 해야 하는 충 忠 속에서, 아울러 노론 벽파와의 갈등 대립 구조 상태에서 정조는 무던히 중용을 지키고 임했을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식에서 거론 불문율인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는 청천같은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왕 즉위 원년 왕실까지 암살자가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얼마나 반대 세력들 사이에서 얼마나 팽팽한 삶을 영위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와 지식과 논리로 대립하고 맞서 싸워야 했고, 암살 시도에 반하여 끊임없이 무술 연마, 활쏘기 연습을 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수원화성 축성 후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할때의 “이젠 되었다!”라는 느끼시는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재위 초반에 노론을 제거시킨게 아닌 몇몇 핵심 반대 세력을 감정이 아닌 논리로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 커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칠 아는 , 정조의 정치 철학 중 권도론과 그칠 지(止)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정조의 대처 방식을 배운 것 같습니다.

일에서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 며, 말을 다하려고 하지 말라
重不要做到十分 를不要說十分
- 정조, 홍재전서 161권 일득록
이후 또 한차례의 호프 뒷풀이는 또다른 학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정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이해하고 확산하려는 분들의 대화는 저 자신의 안이함을 반성하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조의 리더쉽, 그 가슴 뛰는‘유소불위(有所不爲)’ 정신!

9월 20, 2011 1개의 댓글

PM계의 대부이자 PMI한국챕터 회장님이신 박영민 대표님의 소개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쉽 연구소  박현모 교수님이 주관하시는 총 10강의 구성된 “정조이야기” 가을 학기의 첫 강의를 들었습니다.

정조

1부 : ”18세기 문예 부흥과 정조의 지적 리더쉽” (한국중앙연구원 정순우 교수님)

18세기는  주자학의 ‘성인’ 담론의 한계와 그 당시의 ‘나의 참다운 길’을 모색하던 변화 속에서 정조대왕의 북학파 이야기를 수렴하면서, 동시에 중화주의를 강화하는 정치적인 기량의 면모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언진이라는 당시 27세의 나이로 자신의 참다운 길을 모색해야한다는 의미로 ‘전성이 가던 길을 가지 않아야 비로소 후대에 참 성인이 되리”라는 당시 사회 상을 발생하기 시작했고, 정조는 다산 정약용의 시스템화를 위한 노력에 힘입어 향촌체계까지 싶숙히 시스템화를 시킨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샌님의 “나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의 시를 짓겠다”는 등 18세기의 당대 지식인들의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역량을 모아 정조대왕은 (1) 민국(民國), (2)만천명월주(萬川明月主), (3) 의리탕평론(義理蕩平論)의 정책을 펼치셨다고 합니다.

 

 

 

2부 : 정조실록과의 만남 – 영조시대의 유산 (박현모 교수님)

첫 시작을 트루먼 쇼와 오이디푸스의 비유를 들어, 세종대왕이 트루먼쇼의 주인공 같다면, 정조대왕은 오이디푸스가 연상된다고 하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정조대왕 모두 굶주리고 억울한 백성이 있는지 임금께서 직접 도성으로 나아가 확인하는 모습에서는 백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15년 전 정조 연구 시의 모습은 강력한 정치가 였는데, 현재 느끼는 정조의 모습은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모습이라고 하시네요. 그러면서 정조대왕의 이미지에 대서 언급해주셨는데요, 대표적인 키워드가 “만천명월주(萬川明月主)”로 달,종소리,책 이렇게 3가지가 그분의 대표 이미지라고 하십니다.

 

정조시대의 정서를 잘 담고 있는 정조가 발탁한 소론계 홍양호의 글을 소개해 주시면서 한 농부가 홍양호에게 기러기를 바치며, 이것들이 꿩보다 맛이 좋다고 드셔보시라고 권했습니다. 이때 홍양호는 이렇게 답했답니다. 정조가 발탁한 홍양호라는 인물의 가치관을 통해, 정조의 철학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맙소사! 이렇게 좋은 새는 죽이는 법이 아니다. 이 놈들이 날아갈 제 엄격한 질서를 지키는 것(禮)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또 짝을 지을 제 제짝에게 충실하니 의롭고(義), 남쪽으로 날아갈 때 해의 따뜻함을 따라가니 지혜롭고(智), 저멀리 떠나가도 틀림없이 돌아오니 믿음직하고(信), 부리나 발톱으로 다른 짐승과 싸우지도 아니하니 어질지(仁) 아니하더냐. 기록 깃털 달린 새에 지나지 않는다만 이놈들인 인의에지신(仁義禮智信)의 오덕을 모두 갖추고 있느니라”

 

정조실록의 구성으로 (1) 관습적 , (2) 행정적, (3) 정치적 (4) 철학적 부분의 각각의 예를 훑어주시면서, 정조대왕의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조의 어록으로 “평생에 하지 않는 것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平生有所不爲 然後方能爲人所不能爲者]” (<홍재전서> 제172권. 일득록)를 읊으며 제1강의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느낀점

오늘의 정조 키워드는

달/종소리/책의 정조대왕 이미지

만천명월주(萬川明月主)의 민(民)사상

안정과 개혁이라는 정치적 균형감각 의리탕평론(義理蕩平論)

‘유소불위(有所不爲)’라는 마음가짐

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10강의 중 첫 강에서 이렇게 감동을 받으면 나머지 9강은 얼마나 큰 감동을 줄지 기대되네요.

 

아울러 이러한 한국의 위대한 전통 문화를 보다 더 일반 대중들이 접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Fact가 아닌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갈등구조, 아울러 의사결정이 필요한 시기의 정조가 취한 결정, 이에 대한 배경 등등의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나간다면 국민 모두의 가슴 벅찬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사단법인 한국형리더쉽개발원 박현모 대표님을 포함한 스텝진분들과 PMI한국챕터 박영민 회장님과의 호프 시간에 나눈 우리의 전통 역사, 문화유산의 위대함, 이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프로젝트리서치의 연구활동에 대한 방향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몇  PM전문가가 모여서 만든 “한국전통PM문화연구회”의 구성원 분들과 이야기하여 한국형리더쉽개발원과 다양한 Liason 연구 및 계몽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 느껴지는 흥분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슴뛰는 삶!!이 이런게 아닐까 하네요.

 

필자의 관련 연구는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정조, 조선 개혁을 향한 프로젝트 리더쉽

2. 수원 화성 답사 – 한국 프로젝트 지식 체계 모범 사례

3. 기획 및 연구자의 롤모델이 되는 다산 정약용 – 茶山 丁若鏞

 

 

기획 및 연구자의 롤모델이 되는 다산 정약용 – 茶山 丁若鏞

6월 30, 2011 5개의 댓글

정조 조선 개혁 프로젝트 리더쉽에 대해서 화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당시 설계자였던 다산 정약용 및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됩니다.

NewImage이에 대해 파면팔수록 정말 정약용 선생의 박학다식과 지혜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우선 수원화성이 만들어지기 200년전에 임진왜란 (1592-1598)을 겪습니다. 이때 일본은 서구에서 들여온 조총/천리경 등 당시의 첨단 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조선은 피폐화 되었고, 이의 복원을 위해서는 사장학詞章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 등은 적합하지 않고 국가의 총체적 개혁과 대외개방을 지향하자하며 실학實學이 대안으로 대두됩니다.

 

결국 실학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시대 요청에 대한 철저한 인실학은 조선후기의 새로운 시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양문물을 참조함과 동시에 고대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개혁방향을 제시를 해야했고, 영조/정조 시절에 조선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사회,문학,회화,서예,지도,과학,무예 부분에서 꽃을 피웁니다.

 

정약용 선생은 이러한 실학 정신에 밑바탕을 둔 학자로써, 22세 이전에 천여권의 책을 섭력하고, 발탁되어 정조가 즉위하자 마자 만든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정책 공부 및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로 등용됩니다. 똑똑함에 정조의 총애를 받는 학자였구요. 약 7-8년여 규장각에서 정조와 열심히 정책/개혁 토론을 하게됩니다.

규장각 야경

 

1789년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기려합니다. 이때 5천여명의 행렬 인원이 한강을 지내기 위해서 배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정약용에게 이에 대한 묘수를 짜라고 시킵니다.  이때 정약용은 배를 36척의 배를 붙여놓고 배 위에 송판을 깔아 배다리를 완료시키고, 5천명의 행렬이 따르는 사도세자 묘의 이장을 잘 마무리하게 됩니다.

배다리

 

이의 실력을 인정하여 정조는 수원화성 설계를 정약용에게 맡깁니다. 정약용은 규장각에 있는 외서들을 섭력하고 준비하여 3년만에 화성 설계를 완성합니다.  이때의 나이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31살이었습니다.

어제성화주략

 

수원화성은 길이 약 5.7km의 그 때 당시론 남쪽의 신도시로 군사적 방어 목적과 상업적 활성화를 위해 설립되었고 48개의 건축물이 각각의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각각의 건축물들은 실학 정신이반영되어 공심돈은 중국 요동지방의 계평돈을 모델로, 측면 공격을 위한 치성은 유성룡의 “정비록”을 참고하였고, 4대문의 옹성은 임진왜란때 적의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단점을 보완하고자 하여 만든 철저한 실용 중심이었습니다.  수원화성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도 되었습니다. 수원화성에 대한 글은 정조, 조선 개혁을 향한 프로젝트 리더쉽 – SDS 강연 후기 를 참고하세요.

800px Bifyu 8

 

 

하지만, 화성 공사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노론 벽파는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유교정신에 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 서학(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시도합니다. 정조는 이를 지켜주기 위해 다산 정약용 선생을 암행어사로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조선의 탐관오리의 비리와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줍니다.  영화 조선명탐정의 주인공이 바로 정약용 선생님 입니다. 그때의 사회적 배경 및 사건은 다산 선생님의 저서인 흠흠신서를 기준으로 각색된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좀 희화된 면이 많지만 이렇게라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은 것 같네요.

1300682526 1

 

1800년 다산의 나이 39살이 되는 해는 노론/벽파의 정조의 음해 공작이 글에 달합니다.  6월12일 정조는 다산에게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나, 그로부터 16일 후인 6월28일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으로 2주만에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있지만,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왜냐면 이듬해인 1801년에는 노비제도가 정조의 노력으로 폐지되는 해였거든요. 물론 정조가 돌아가시고 폐지하기로 한 노비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DSC02002.jpg

 

이렇듯 1800년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이듬해 1801년 부터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시게 됩니다. 1802년이면 다산의 나이 41세로, 유배지에서 2년 정도 되는 시점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경학공부로 밑바탕을 다지고, 역사책을 섭력하여 근원을 헤아려보고,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평소의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DSC01997.jpg

 

18년간의 유배시절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숭고한 뜻을 소위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라는 저술로 그려나갔으며, 무려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이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산 선생은 다양한 방면의 조선의 개혁/민생의 개혁을 위한 연구가였습니다. 말이 500권이지 1년에 약 30여권에 이르는 분량입니다.

Screen shot 2011 06 30 at 11 17 40 AM

 

이를 기록으로 남겨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정신을 기록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기록 정신은 정조대왕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의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죽은 사건 이후 매일매일의 일을 일기를 통해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왕으로 즉위한 이후 5년 후에는 이 기록을 규장각 각신에게 시켜 공문서로 “일성록”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시킵니다. 일성록은 왕의 시각에서 하루하루의 정사를 기록한 장부이고, UNESCO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를 만들때 정조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합니다.

“내가 일성록을 편찬한 것은 내 덕행을 남기려 함이 아니다. 미화하지 말고 
반드시 있는 그대로 쓰라. 그래야 훗날 이 일성록을 보는 자가 오늘날 나와 
각료들의 판단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가할 것이 아닌가.”

 

Screen shot 2011 06 30 at 11 55 37 AM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설명은 VANK가 만든 동영상 “백성을 사랑한 학자 정약용”을 참고하세요.

 

 

 

제가 몸담고 있는 IT 분야도, 200년전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 세계의 IT는 활황인데 반해서, 우리 IT만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의 원인으로는 IT 근본인 PM 지식체계 및 프로세스 체계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지고, 서양의 체계(PMBOK, ISO21500, PRINCE2,CMMi 등)의 근본을 묶어 우리 체질에 맞게 변형하여 보급하여야지만 보다 쉽게 도입되리라 확신하고, 이 분야를 매진해보려고 합니다.  200년전의 다산 정약용 선생을 롤모델삼아  IT PM분야에서 지식/체계의 틀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정조, 조선 개혁을 향한 프로젝트 리더쉽

6월 28, 2011 2개의 댓글

S사 PM분들을 대상으로 “정조, 조선 개혁을 향한 프로젝트 리더쉽”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정조의 수원 화성은 200년전 조선의 프로젝트 관리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 유적 자산입니다. 우리 선인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관리 기법을 보여줍니다.

  • 수원 화성은UNESCO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화성은 조선 정조시대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를 정조의 승인을 받아 “어제성화주략”화되어 재상을 지낸 채제공의 총괄 및 화성 축성 공사책임은 감동당상(PM) 조심태의 책임하 실제 28개월 만에 완공했습니다.
  •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의 공사 일정, 공사에 종사한 감독관의 인적사항, 그리고 그림을 곁들인 각 건물에 대한 설명과 자재 운반용 기구, 건물의 세부 설명글이 들어 있습니다. 의궤에는 공사 수행 중 오간 공문서와 왕의 명령, 상량식 등 의식,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과 각 건물별로 소요된 자재의 내용과 수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체 공사비용의 수입과 지출 내역도 꼼꼼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2007년 UNESCO의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 되었습니다. 200년전에 남아있는 공사계획/공사완료보고서로는 본 문서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 화성 프로젝트는 PMBOK 42개 프로세스 중 통합,범위,원가,품질,HR,소통,리스크,조달에 이르는 대부분의 프로세스를 지키고 있음을 기록으로 보여줍니다.이는  200년전의 세계 어느 유적도 이러한 기록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Critical Path 분석과 Fast Track 기법을 이용하여 당초 10년 계획을 28개월 만에 완공시킨거였습니다. 또한 Parametric Estimation/모수기법을 사용하여 일정/예산 수립의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 거중기, 녹로, 유형거, 동차 등 직접 실학파 정약용이 직접 설계한 공사 도구로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거중기로는 당시의 공기 단축은 물론 인건비 절감으로 약 4만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 부역이 아닌 실적제 인건비 지급방식이 시행되었으며, 20여개의 직무별 인건비가 차등화되어 지급되었습니다. 이러한 관리는 반나절 기준으로 기록되어 일반직인 5일단위, 임시직은 일일단위로 인건비가 지급되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최초로 실명제와 인센티브 및 여름에상벌제도에 의해 품질을 높였습니다.

수원화성의 프로젝트와 이것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아울러 영조-정조-실학파-정약용-채재봉-조심태-노론-소론-남인 등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매력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강의 순서는 아래와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90여장의 PT 중 핵심적인 몇가지만 공유합니다.

1부는 화성 및 화성성역의궤에 대한 개요와, 정조의 소년/청년 및 왕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노론 벽파의 갈등 대립과 연계하여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원 화성을 통해 조선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배경 등을 설명하였습니다.

NewImage NewImage NewImage

2부 에서는 수원 화성 프로젝트의 주역인 채재공, 정약용, 조심태의 간단한 캐릭터 배경을 설명하고, PMBOK의 9가지 지식영역 하나하나 비교 설명을 하였습니다. 200년전의 정조가 내려주는 프로젝트 정책/지침에 의해서 채재공과 조심태가 철저한 관리 기술을 부려,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프로젝트 관리 분야나 건설 관리 분야에 계신 분들은 놀랄 정도로 정교하게 관리되었음을 보여주는 항목입니다.

NewImage NewImage

3부는 정조의 프로젝트 리더쉽 분야입니다. 리더쉽은 지식체계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닌 온 힘을 다해 목표에 달성하고자 하는 열망과 지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유한 때론 강건한 카리스마입니다. 정조대왕 및 조심태는 상벌에 대해  철저하신 분들이었습니다.

Newimage61

맨마지막으로  착수 > 기획 > 실행 > 감시 및 통제 > 종료 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체계적으로 거친 정조의 조선개혁 프로젝트는 정약용의 3년에 걸친 화성 설계, 정조의 프로젝트 정책 하달,  조심태의 엄격한 감시 통제 및 성과급/상벌제도/인본주의/리더쉽 및 당시의 실학파의 실용기술과 어우러져 현존 유일한 세계 최고의 화성/화성성역의궤를 완료시킵니다.  이는 정조의 열린 대화 및 소통의 영향이 큽니다.

이후 토론 과제를 두어 당시 조선의 노론/벽파와의 당쟁(문제)에 따른 조선 개혁(해결책)으로 수원화성을 기획/진행했듯이, 회사의 프로젝트 관리 환경에서의 문제/해결책을 토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일방적인 강의보다는 토론식 대화를 통해 스스로 문제를 도출하고 컨센세스를 맞춰 추진하는 모양새가 정조/정약용/채재공/조심태가 펼쳤던 진행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NewImage

보통 우리나라는 이것밖에 안되라는 자기 비하적인 발언을 많이합니다. 이는 “조센징은 이것 밖에 안되”와 동일한 일제치하의 굴욕적인 모독과 동일한 발언입니다. 500년전의 조선시대의 역사의 기록으로 부터 우리나라 선인들의 우수한 문화 , 실용 정신은 물론 리더쉽, 프로젝트 기술까지도 문헌으로 남아 있으며, 정조의 수원 화성/화성성역의궤가 이에 대한 정수입니다. 이 또한 동일 시대에 전세계 적으로 남이있는 유일한 프로젝트 기록 산물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으로써 자긍심을 가지고 프로젝트 프로세스 / 지식체계의 기교를 부리시기 바랍니다.  표준 지식체계가 없으시면 미국 ANSI 표준인 PMBOK을 기준으로 하시는 것이 향후 글로벌 프로젝트 추진시에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당 발표를 위해 약 400여 인터넷/DVD/박물관자료/논문을 참고했습니다. 이 중 핵심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문헌을 공유합니다.

  1. Finding the Future of Project Management from Hwaseong Fortress Project, Young Min Park, PMP
  2. 2008프로젝트관리지식체계 지침서 (PMBOK 지침서) 4판, PMI
  3. Hwaseong Fortress, Wikipedia
  4. Hwaseong Fortress/수원화성DVD, RMJC, 2000
  5. 알기쉬운 화성이야기,수원화성박물관, 2011
  6. 18세기『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나타난 조선의 사회상, 李永鶴, 2011
  7. 아름다운 수원화성, 최준식, 2010화성건설공사에서 자재의 조달방법 연구, 김균태, 2009
  8. 화성 성역 물자 조달방법(華城 城役 物資 調達方法)에 관한 연구, 최종현, 2009
  9. 팔달문 건설의 소요자원 산정을 위한 화성성역의궤 분석, 김균태, 2009
  10. 조선시대 화성성역의궤의 건설관리적 의미, 김균태, 2008
  11. 조선시대 화성성역의 공정관리 사례분석, 김균태, 2008
  12. 김준혁의 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06
  13.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디펜스코리아, 2006
  14. 화성,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을까?,  오마이뉴스, 20060619
  15. 정조의 화성 경영 연구, 일지사/최홍규, 2005
  16. 정조의 화성 건설, 일지사/최홍규, 2001
  17. 18세기 수원성 축성에 사용된 자재 운반기구에 대해서, 김동욱, 1994

NewImage

 

수원 화성 답사 – 한국 프로젝트 지식 체계 모범 사례

6월 12, 2011 6개의 댓글

PMI 이사인 Dr. William Moylan  박사/교수님을 모시고 한국 프로젝트의 진면목 사례인 수원 화성(1997년 UNESCO 등재)의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Dr. William Moylan 박사는 첫날 PMI한국챕터 창립총회, 둘째날 KSPM/프로젝트경영학회 춘계학술대회 일정을 소화하시고, 셋째날의 한국 프로젝트 문화유산 답사기 이십니다.

정조의 수원 화성은 프로젝트관리/경영 기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과거 200년전의 수원 화성 건축 프로젝트 착수에서부터 종료까지의 모든 과정이 “화성성역의궤” 문서에 의해 문서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보전되어 있습니다.
  2. Fast Track 기법을 이용하여 당초 10년 계획을 3년만에 완공하였습니다.
  3. 거중기, 녹로, 유형거, 동차 등 직접 정약용이 직접 설계한 공사 도구로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4. 또한 각 성곽의 돌 하나하나에 실명제와 인센티브/상벌제도에 의해 품질을 높였습니다.
  5. 정조의 춥거나 더운 날씨에 쉬게하고, 추수때는 농민들을 본업으로 돌아가게하는 등의 인본주의적 경영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수원 화성 프로젝트 기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해 주세요.

  1. 박영민 회장님의 알래스카주립대 논문/발표자료 : Finding the Future of Project Management from Hwaseong Fortress Project 논문 및 발표자료
  2. PMPcafe.com 세미나  정조, 수원화성 프로젝트를 리드하시다 후기 및 동영상
  3. 오마이뉴스의 “화성,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을까?” (2006.09.18)
  4. 수원화성운영재단 홈페이지

110611-PMI_William_Moylan110611-PMI_William_Moylan

 

Moylan 박사님도 한국 화성의 기록 및 기법에 놀라시며, 한국 PM/PMP들은 꼭 보고와서 체험해야한다고 하시네요.^^  4시간여 직접 걸으면서 한국의 모범적인 프로젝트 경영기법을 체험하신 것 같아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이번 답사는 PMI 한국챕터 회원이신 포스코건설의 오보람,PMP님께서 함께하셔서 프리젠테이션 및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110611-PMI_William_Moylan

110611-PMI_William_Moylan

110611-PMI_William_Moylan

110611-PMI_William_Moylan

 

110611-PMI_William_Moylan

답사 내내 초등학생들로 보이는 학생들이 안내 책자와 더불어 과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자원봉사자 가이드분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것저록 기록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얼른 제 딸도 같이 데리고 가서 이러한 훌륭한 문화유산을 함께 체험해봐야겠습니다.

아래는 PMI Korea e-Link에 소개된 전문(2009.03)을 약간 각색하여 소개합니다.

세계문화유산-수원 화성 프로젝트를 통하여 본 프로젝트 경영의 미래

1.요약

수원 화성은 1997년 UNESCO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화성의 축성기록인 ‘화성성역의궤’ 또한 2007년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무릇 프로젝트 유형의 일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여 왔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또는 경주 불국사 등은 수천 년의 찬란한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주는 프로젝트의 산물임에 틀림없지만 프로젝트관리 관점에서는 어느 것도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과 비용으로 또,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었는가는 오직 기록에 의하여만 알 수 있기 때문인데, 이의 기록된 문서가 존재하지가 않기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성 프로젝트는 남다른 이유가 프로젝트관리 관점에서의 상세한 자료를 남겨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줌과 더불어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2백 년 정도의 과거이지만, 당대의 유사한 도시건설 프로젝트인 미국의 위싱턴 DC나 러시아의 페테스브르크에서도 화성축성 프로젝트에 비교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느 분야던 미래를 예측하려면 과거를 알아야 하며, 프로젝트관리 분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원화성 프로젝트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의하여 오늘에도 살아있고 또한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2.프로젝트관리 관점에서의 화성 프로젝트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7일 착수되었으며 1796년 9월10일에 종료되었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34개월이지만 179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6개월간 공사를 중지한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공사 기간은 28개월입니다. 이는 당초 10년을 계획한(화성성역의궤, 연설 1793.3.10) 것에 비하면 1/3도 되지 않은 기간에 종료된 것입니다.

정조는 프로젝트 착수 한달 여 전에 조심태를 감동당상(프로젝트관리자)로 임명하고 화성프로젝트가 곧 시작할 것임을 알립니다. (전교 1793.12.6) 이의 내용은 프로젝트 헌장(PROJECT CHARTER)의 요건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정조의 하교로 다산 정약용이 3년여에 걸쳐 만든 성설을 기본으로 하여 작성된 어제성화주략은 프로젝트 기본계획서입니다. 이 안에는 8가지 항목의 기술적 사양과 공사 기본방침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조시대의 비극적 정치 희생양이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주 속 죽음을 뿌리로 하여 탄생한 화성 프로젝트는 정조의 정치적 꿈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오랜 시간 정조의 치밀한 계획아래 준비되었고, 어제성화주략은 이러한 면밀한 계획의 산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PMBOK GUIDE에서 제시된 프로세스의 반이 기획 프로세스임을 감안하면 화성 프로젝트 역시 면밀한 계획이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화성 프로젝트를 통하여 본 프로젝트관리의 미래

화성의 프로젝트관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프로젝트관리의 미래를 예측해 봅니다.

  1. 프로젝트관리 방법은 지속적으로 변화하지만 근본은 변화하지 않는다.우리는 PMBOK GUIDE의 버전이 바뀌면서 내용이 변화가 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42개의 프로세스 중 25개 프로세스가 이미 과거에도 적용된 사실은 프로젝트관리의 근본인 인적 리더십이나 의사소통의 중요성 등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미래에도 같을 것입니다.
  2. 지속적인 PM개념과 적용분야의 확장MODERN PM개념의 출발을 지난 1950년대의 PERT/CPM 공정관리 개념으로 보면 PMBOK 4TH EDI., IPMA V3.0 등 지속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또한 단일 프로젝트관리 개념이 PROGRAM MANAGEMENT, PORTFOLIO MANAGEMENT 등 경영개념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져왔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4. 새로운 기법과 도구의 출현

PERT/CPM이 과학적 일정 예측 및 통제 기법으로 인정된 이래 비용예측, 자원 예측 등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특히 컴퓨팅 환경의 급속한 발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기법과 도구들을 출현케 하였습니다. 또한 CCPM등과 같은 새로운 기법의 출현은 또 다른 새로운 기법과 도구가 출현할 것임을 말해 줍니다.

5. 과학적 경영기법으로의 지속적 활용

미국의 경영과학자인 리차드 파스칼은 1960년부터 34가지의 새로운 경영기법이 만들어 졌으나 1995년 현재 15가지만이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19가지의 기법이 30년 안에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PM기법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발전하고 있으며, 이는 PM기법은 새로운 과학이 아닌 기존 이론과 기법들의 통합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따라서 PM기법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전과 더불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활용이 되는 경영기법으로 존속될 것입니다.

박영민 회장
PMI한국챕터 박영민 회장은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알래스카주립대학교에서 프로젝트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지난 30년간 공공건설, 중공업 , IT/IS , 연구개발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 하였으며 한국프로젝트경영협회의 창립멤버를 시작으로 PM의 사회적 인식 확산에 노력하여 왔습니다. PMI의 PMP자격증을 국내에 유입하는 산파역을 하였으며 PMBOK Guide 한글 번역검수 위원장 등 PM 국제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PMI, PMAJ, ProMAC 등에서 주제발표를 하였습니다. “Enterprise Project Management”, “성공하는 신제품의 일곱 가지 황금법칙’. ‘PM을 위한 프로젝트 실전 로드맵’ 등 번역서를 출판하였으며, 현재 ISO의 PM표준 제정 프로젝트(ISO 21500)의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IFT Korea의 대표이사로 프로젝트관리 솔루션과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팔로우

모든 새 글을 수신함으로 전달 받으세요.

다른 9,929명의 팔로워와 함께 하세요